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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정보공개 거부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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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공정보를 얼마나 수월하게 많이 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회의 투명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할수록 행정의 투명성이 높아져 부패소지도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정보의 효율적 관리 및 공개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으나 실상은 핵심을 비켜나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 겉도는 정보공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지난해 3월 93~96년분 상속세와 증여세 부과 상위랭킹 1백위 및 이들의 납부.체납현황(익명)등을 공개하라고 국세청에 요구했다.

국세청은 이를 거부했고 경실련은 행정심판을 냈다. 행정심판위원회는 "소득세.증여세 관련 자료와 세목별 감면액 등에 대한 정보는 공개하라" 며 경실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국세청은 "자료가 없다" 는 이유로 증여세 관련 자료는 하나도 넘겨주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은 아예 '정보공개법' 에서 열외라는 입장. '국가안전보장에 관계되는 정보 및 보안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서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분석을 목적으로 수집되거나 작성된 정보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는 정보공개법 4조3항을 들어 '주요문서목록' 조차 공개할 수 없다는 것. 또 통일부는 남북회담과 관련된 비밀 문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용에 관계없이 공개하지 않는다.

지자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질검사 결과를 공개하는 것은 환경오염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지난 6월 청주시 문정동 쓰레기매립장 주위 하천의 수질검사 결과를 공개해 달라는 청주환경운동연합회의 요청에 대해 청주시가 통보한 거부사유다. 그러나 연합회측은 납득하기 어렵다. 같은 시기에 검사를 실시한 11곳 가운데 수질에 문제가 없는 곳으로 나타난 9곳의 검사결과는 이미 발표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될성싶은 내용은 슬쩍 빼버리고 나머지만 알리는 게 '정보공개' 입니까. " 이 협회 관계자의 지적이다.

비공개 사유도 다양하다. 경기도 연천복지신문은 지난 1월 연천군내 10개 읍.면에 96년 수해 당시 수해대책위원회에 지급된 복구금액 등 지출내역과 대책위원회 명단에 관한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지자체측이 발표한 지원규모와 실제 지원내용이 차이가 나 조목조목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나같이 "정상적 업무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는 이유로 거부했다.

'개인정보보호' 도 단골 메뉴. 판공비 공개 거부가 대표적 사례다. 경북 칠곡군에 사는 최상준(崔相俊.58.농업)씨는 지난 6월 군수 판공비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군측은 '판공비는 법인.단체.개인의 영업상 비밀이므로 비공개대상' 이라고 통보했다. 시민단체인 인천연대로부터 같은 요청을 받은 인천시 일부 구청들은 "판공비 일부가 저소득자 지원에 쓰여졌는데 공개될 경우 이들에 대한 정보가 유출된다" 며 거부했다.

인천연대 관계자는 "판공비 내역을 공개한 2개 구청의 경우 상당액이 술값.팁 등으로 지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고 전했다.

정보공개에 대한 인식 부족도 문제다. 심낭희(沈娘希.20.대학생)씨는 최근 용산구의회 의원들의 외유(外遊)실태에 대한 정보를 청구했다가 용산구 직원으로부터 엉뚱한 제의를 받았다.

"정보 공개를 정식으로 청구하면 상부에 보고해야 하고 또 말썽이 생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찾아오면 잘 가르쳐줄 테니 정보공개를 청구하지 말라. " 沈씨는 씁쓸했다.

◇ 허술한 정보관리〓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대 박사과정의 제임스 샵(29).지난해 2월 박사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논문 주제는 '한국의 산업합리화 전개과정과 정책결정과정에 관한 비교연구' .그러나 70년대 산업합리화정책에 관한 정부의 공식문서가 전무하다시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제그룹 해체.사채시장 동결 등 굵직한 경제정책과 관련자료도 거의 없다. 비경제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회에는 제3공화국 헌법심의록이 없다. 정권교체기엔 문서폐기 작업이 아예 노골적으로 이뤄진다.

문서를 없애 뒤탈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그릇된 보신주의와 행정비밀주의가 어우러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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