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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로씨 수기 독점게재]5.어머니,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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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8년 2월 21일 막 자정이 지난 시간, 인질극을 벌인 후지미야 여관의 그 첫날,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조금 전 살인을 한 사람답지 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내 전화를 받은 시미즈 경찰서의 니시오 (西尾) 주임은 다급하게 외쳤다.

"날세, 지금 자네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아는가. 지금 어디있나. " 그는 평소 그래도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경찰이었다. '그라면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다. ' 나는 여관 손님들에게 여관 이름을 묻고 소상히 위치를 설명했다.

일본 경찰들이 빨리 후지미야 여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통화가 끝난 후 2층으로 올라가 모여 있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독하게 못살았던 어릴 때 이야기, 어머니와 우리 가족 이야기, 야쿠자 2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을 말했다.

그 중 내가 가장 열을 내며 이야기했던 것은 민족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여러분은 일본인입니다. 나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여러분 못지 않게 일본말을 하며 글도 쓸 줄 압니다. 우메보시 (梅干し : 매실장아찌) 도, 누카즈케 (糠づけ : 겨된장에 담근 야채) 도 잘 먹습니다. 이처럼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일본인에게 한을 품거나 미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야쿠자 2명을 죽인 것은 그들이 너무 악랄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포를 멸시하고 돈을 빼앗고 심지어 내 조카의 손가락까지 잘랐습니다.

나는 이런 녀석들을 살려두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던져 저항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사람을 둘이나 죽였으니 잡히면 사형을 당하겠지요. 살아서 일본 경찰의 수갑에 채워지기보다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깨끗하게 자결할 생각입니다. 여러분께는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있으니 죽을 때는 여관 앞 마당에서 폭사하겠습니다. "

사람들은 멍하니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1년 전 그 때 죽었어야 할 목숨이 이렇게 이어져 어머니의 나라로 왔다.

고국에 온 지 6일째인 13일 오전에는 부산시청을 찾아가 '281120 - 1120215' 라고 적힌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權禧老' 라는 이름을 몇번이고 다시 봤다.

안상영 (安相英) 시장은 내게 '명예시민' 기념 금메달까지 줬다.

오후에는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鄭夢準) 회장으로부터 아파트 열쇠도 받았다.

동포들의 따뜻한 마음을 접하니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 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는 후지미야 여관의 손님들을 두개의 방에 분산시켰다.

아이들과 엄마를 떼놓을 수 없어 작은 방에 넣고 나와 함께 있도록 했다.

나머지 남자들은 큰 방에 넣어 자유롭게 쉬도록 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사람들도 내 말과 행동에 안심이 됐던지 편안하게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는 사건 3일전 아오모리 (靑森 : 일본 동북지방의 맨끝) 현 도와타 (十和田) 시의 산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기로 최종적으로 마음먹고 그 때의 내 심정을 작은 갈색수첩에 기록해 놓았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수첩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어머니, 나는 마음 깊숙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행한 일만 계속돼 먼저 이 지구로부터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죽는 인간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죽고 난 다음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만 이 세상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내가 만일 다음 세상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진심으로 이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겠습니다. 스스로 택한 길이기에 미련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다른 몇몇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희로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

최근에 본 일본 영화 '김의 전쟁' 에서는 여관 벽에 '김희로 (金嬉老)' '권희로 (權禧老)' '가네오카 야스히로 (金岡安廣)' '곤도 야스히로 (近藤安廣)' 등 나의 여러 이름들이 잔뜩 적혀있던 데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아오모리에서 기록했던 수첩 내용의 일부를 낙서했던 것 같다.

민족차별에 대한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그런 낙서를 한 듯하다.

사람들은 '인질극' 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재판과정에서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관집 주인 아주머니 모치즈키 에이코 (望月英子) 는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아이들 수발을 하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나는 벽에 엽총을 기대 놓고 쉬면서 아이들과 함께 TV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아카카게, 아오카게 (빨간 그림자, 파란 그림자)' 란 드라마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험물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들과 친해져 용돈을 건네주기도 했다.

수시로 큰방으로 건너가 앉거나 드러누운 사람들에게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다 같은 인간인데 우리가 언제 어디서 너희들에게 나쁜 짓을 했느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와카라나이나 (잘 모르겠는데)"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 시간, 일본 경찰들은 얼어붙은 눈길을 따라 내가 가르쳐준 스마타쿄 (寸又峽) 의 후지미야 여관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사건발생 다음날 새벽 무렵이었다.

다다미를 쌓아둔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일본 경찰들이 중무장을 하고 여관을 포위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일본 사회와 경찰들로부터 민족차별에 대한 잘못을 인정받고 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게지메 (매듭)' 를 짓겠습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십시오. " 총을 쥔 손에 진땀이 배어들고 있었다.

<계속>

◇ 알림 = 권희로 (權禧老) 씨의 국내 정착과 앞으로의 활동을 돕기 위한 후원회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부산 자비사로 연락바랍니다.

051 - 467 - 2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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