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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 칼럼] 50세의 遠見, 61세의 열정, 104세의 지혜

중앙일보

입력

중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해 대륙 현인(賢人) 인터뷰를 구상하고 베이징으로 떠난 것은 지난달 12일이었다. 6박7일간 네 명의 학자를 만났다. 포린 폴리시가 ‘세계 100대 지성’으로 선정한 왕후이(汪暉·50) 칭화대 교수, 알파벳을 활용해 한어(漢語) 병음 표기 체계를 개발한 저우유광(周有光·104) 선생, 공자와 유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리링(李零·61) 베이징대 교수, 천라이(陳來·57) 칭화대 국학연구원장이었다. <중앙sunday 9월 27일자, 10월 4일자>

이들 학자를 만나면서 중국을 제법 안다고 착각했던 자부심은 무참히 무너졌다. 중국 사회를 떠받쳐온 지식인들의 저력과 역량을 너무 몰랐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겸손(謙遜)으로 사람을 대하고, 열정(熱情)으로 학문을 닦고, 낙관(樂觀)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다. 한국의 어느 학자 못지않게 뛰어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저우 선생과 왕후이·리링 교수는 모두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고초를 겪었다. 저우 선생은 ‘반동학술권위’ 혐의로 닝샤(寧夏)노동개조소로 끌려갔다. 그곳에만 12만 명가량이 수용됐는데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마오쩌둥과 4인방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마오가 지식인을 박해한 것은 제일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화내지 말라.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너 자신을 벌하는 거다”고 말했다.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 온 노학자의 응축된 지혜였다. 그의 검소한 생활은 더욱 옷깃을 여미게 했다. 국보급 학자로 존경받지만 그는 1980년대 지은 낡은 아파트에서 50년 넘은 책상을 쓰고 있었다. 팔꿈치가 닿는 책상 앞부분이 닳아 비닐로 덧씌워 놓은 게 눈에 띄었다. 값싼 무명천으로 만든 하얀 가운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리링 교수 역시 20세부터 7년간 네이멍구와 산시(山西)성 농촌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최근 발간된 ‘1970년대:내 마음 속 파편’이란 글을 통해 ‘어디에 가든 책을 놓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청년기의 암울한 시절에 국내외 작가와 사상가들의 저작을 독파하면서 학문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문혁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이 ‘시간부자(時間富翁)’였다고 말했다. 79년 부친이 복권될 때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을 터인데 글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부분은 찾기 힘들다.

중국 학자들의 강점은 문(文)·사(史)·철(哲)의 인문학을 뛰어넘어 사회과학과 예술 분야까지 뻗어나가는 통섭(通涉)에 있었다. 리링 교수만 해도 77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금문(金文)자료 정리부터 시작했지만 고문자 연구, 진(秦)나라 토지제도 연구에 이어 역사지리·사상종교사·과학기술사·예술사 등으로 지적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는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공자와 유교, 전통문화를 독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왕후이 교수는 50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공 분야인 중문학을 벗어나 인문·사회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가 쓴 10여 권의 책 이름만 훑어봐도 관심 분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중국에서) 정치 안정이 중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력구조 속에는 위기가 사방에 있다(危機四伏)”고 진단했다. 중국의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명쾌한 한마디였다.

대학들의 개방성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지방대학(장쑤성 양저우사범대학) 출신의 왕후이는 사회과학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칭화대를 기반으로 활약 중이다. 천라이 교수는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오가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리링 교수 역시 베이징대 출신이 아니다. 대학끼리 문호 개방을 꺼리는 한국 풍토와는 다른 현상이었다.

노벨상 시즌을 맞이해 요즘 중국에선 “중국 국적 학자도 분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까지 외국 국적을 가진 중국계 학자 8명이 노벨상을 받았지만 대륙에선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노벨상 꿈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수 있다. 왕후이·리링처럼 학문에 매진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품게 된 생각이다. 중국 학자들은 해외 대학·연구소와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선 그동안 국제정치와 경제의 잣대로 중국을 관찰해왔다. 그러나 차이나 파워가 급팽창하는 현실에서 중국이 지식강국, 문화강국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무엇으로 답해야 할까. 믿을 건 한국 지식인들의 대(大)분발뿐이다.

이양수 국제 에디터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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