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애니메이션 기술로 만화에 날개 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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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수많은 소프트웨어 가운데 어떤 것이 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적합할까 늘 주의 깊게 살핀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이것은 만화계에 내려오는 일종의 ‘전설’이다. 13년 전 천계영(39) 작가가 만화잡지 ‘윙크’의 신인만화 공모전에 출품했을 때, 그의 만화를 받아든 심사위원들의 첫 반응은 “이게 뭐야?” “이거 만화 맞아?”였다. 당시만 해도 ‘만화’란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스크린톤을 이용해 색과 배경을 입힌 것이었다. 만화 원고는 작가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울퉁불퉁한 종이 뭉치였다. 당시 천계영의 출품작은 ‘포토샵’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그려, 이를 출력한 맨질맨질한 인화지였다. ‘컴퓨터로 만화를 그린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이런 시도는 충격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대개의 만화가는 포토샵 등의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작업한다. 그때부터 천 작가에게 ‘천재 만화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의 한 장면. [박종근 기자]

그런 그가 또 한번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3차원(3D)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으로 출판 만화를 그린다는 것이다. 최근작인 ‘하이힐을 신은 소녀’ ‘예쁜 남자’ 등을 보며 “그림이 유난히 입체적이고 선명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3D로 만화작업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뚜렷이 와닿지 않았다. 이 복잡하고 새로운 도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머릿속 구상을 제대로 재현하고 싶었다.”

스타일이 뚜렷한 천계영의 그림에 감탄하는 팬들은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그가 3D 프로그램을 활용하게 된 계기는 “그림 실력에 한계를 느껴서”였다.

“‘오디션’을 작업할 때였어요. 머릿속에선 한없이 자유로운 주인공의 모습이 맴돌았는데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기엔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지요. 뭔가 도움받을 곳이 없을까 고민하다 3D 애니메이션 작업을 만화에 접목하는 방법을 떠올렸죠.”

3D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모니터상에서 주인공을 움직이게 한 뒤, 그 중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을 스톱시켜 이를 지면에 옮길 수 있다. 다양하고 역동적인 앵글이 가능해진다. 등장인물의 집이나 학교 등 활동무대를 3D로 만들기 때문에 현실감을 더한다. 또한 초기 등장인물의 신체 형태와 동작·표정 등을 저장시켜 놨다가 상황에 맞게 이를 불러다 쓸 수 있어 인물 하나하나를 새롭게 그릴 필요가 없다. 천 작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웃집 토토로’의 모든 원화(原畵)를 직접 그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설명했다. 작가가 전체 작품의 모델링과 콘티 작업을 한 뒤 장면 구성은 어시스턴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 뒤엔 누구나 3D로 작업할 것.”

설명만 들으면 얼핏 간단하고 편해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3D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 자체가 우선 힘들다. 천 작가는 인터넷 검색도 하고 블로그 활동도 하는 보통 네티즌이지만 웹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 같은 분야는 문외한이었다. 포토샵이나 지금 하는 3D 프로그램을 익히는 데 몇 달을 끙끙 앓아야 했다.

여기에 작품 초기 주인공의 모델링이나 동작·표정을 샘플링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일본에서도 ‘마법선생 네기마’의 아카마쓰 겐, ‘간츠’의 오쿠 히로야 등 젊은 작가들이 3D 프로그램으로 배경작업을 하지만, 천계영의 ‘하이힐을 신은 소녀’처럼 인물을 포함한 전 작업의 99% 이상을 3D로 처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의 경우 주인공 ‘고경희’의 3D 기본형 모델을 만드는 데만 석 달이 걸렸다. 표정이나 동작도 샘플을 불러온 뒤 개별 상황에 맞게 하나하나 다시 손봐야 한다. 머리카락이나 옷 주름 같은 섬세한 부분은 아직도 포토샵으로 매만진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작업을 고집하는 건 ‘그림의 완성도’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만 가능했던 프레임이나 동작이 실제 그림으로 옮겨지는 걸 확인할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초기에 시간과 노력이 무척 들지만, 일단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 효율성이 크게 향상된다.

“10년 전만 해도 많은 만화가가 제 포토샵 작업을 보면서 그 어려운 걸 배우느니 그냥 손으로 그리겠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포토샵을 쓰죠. 3D 만화 역시 10년 뒤엔 만화의 대세가 될 거라 확신해요.”

만화전문 출판사 거북이북스의 강인선 대표는 “천 작가의 작업은 그동안 ‘수공예품’과 비슷한 만화의 공정을 혁명적으로 바꾼 것”이라며 “그림의 질을 높이면서 만화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촉진할 뜻깊은 시도”라고 평했다.  


부천=이영희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천계영 작가는 이화여대 법학과를 나와 광고대행사를 다니다 26세인 1996년, 만화잡지 ‘윙크’의 신인만화공모전에 출품한 ‘탤런트’가 대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첫 장편 ‘언플러그드 보이’에서 보여준 독특한 그림체와 개성 있는 스토리로 황미나·신일숙 등의 뒤를 잇는 ‘순정만화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오디션’은 98년부터 3년 연속 순정만화 판매부수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주인공들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현실의 유행을 선도해 ‘트렌드를 한발 앞서가는 만화가’ 소리를 듣는다. 요즘은 잡지 ‘윙크’와 인터넷에 ‘하이힐을 신은 소녀’‘예쁜 남자’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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