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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따로따로 사건들, 문장을 만나 생명을 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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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무도하
김훈 지음, 문학동네
328쪽, 1만1000원

작가로서, 김훈(62)씨 만큼 ‘압축 성공’한 경우도 드물다. 김훈 식 표현대로 하면, 수 십 년간 ‘기자질’로 밥을 벌은 그가 1995년 장편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을 펴내며 오매불망 바라마지 않던 작가 직함을 얻었다고는 하나 책 판매, 문단의 평가 등 세속적 성공은 2000년대 들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출세작인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와 산문집 『자전거 여행』(2000년), 흥행 동원력을 재확인한 소설 『남한산성』(2007년) 등이 모두 오래지 않은 얘기다. 불혹의 나이로 그것도 여성지로 등단해 일가(一家)를 이룬 소설가 박완서, 역시 늦깎이로 등단해 전무후무한 생산력을 과시한 작가 이병주(1921∼92)가 무색할 지경이다. 말하자면 작가로서 그의 성공적 전신(轉身)은 육십 평생의 마지막 십 년에 집중돼 벌어진 일이다.

인터넷 포털에 연재돼 이미 독자층이 확산된 이번 새 소설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된다. 잘 팔리고 상도 재깍재깍 받아 치우는 그의 소설의 비밀은 무엇일까.

평론가 신수정씨의 작품 해설에서 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2006년 출간된 소설집 『강산무진』 뒤에 붙인 해설에서 신씨는 김훈 소설이 전통 소설 작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진단한다.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 기본적으로 성장의 과정을 서사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데 비해” 김훈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청춘의 모험이나 방황 같은 관습적 패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번 장편소설은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듯한 느낌이다. 우선 소설의 중심인물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매일신문의 사회부 사건 기자 문정수와 그의 연애 상대인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일 텐데 그들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긴 하지만 결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중심인물)’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소설은 문정수·노목희와 같은 비중으로 소방관 박옥출, 노목희의 대학 선배 장철수, 외동아들이 기르던 개에 물려 죽는 비극을 겪는 여인 오금자의 사연을 전한다. 이들을 통해 공무원의 부패, 장기 밀매 현실, 아동 안전 사각 지대 등 우리 사회의 병리 부분들을 건드린다. 이런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은 큰 줄기의 이야기도 없다. 때문에 소설은 모래알 같은 사건들을 나열하는 옴니버스 ‘지옥의 묵시록’이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김씨 특유의 문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김씨는 산문집 『풍경과 상처』(1994년) 서문에서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라고 썼다. 절창이다. 그런 문장들, 이번 소설 안에 많다. 그러므로 김훈 소설을 읽는 것은 사실은 그의 문장을 읽는 일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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