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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실험실 과학도, 이제는 무대 위 음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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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97년 봄 서울대 음 대 오케스트라 연습실. 악기 전공생들 뒤로 공 대 전기공학부 4학년 학생이 앉아 있었다. 오케스트라 수업마다 나타나는 청강생, 백윤학(34)씨였다.12년이 흐른 지난달 말 경기도 부천시민회관. 그는 부천시립교향악단과 함께 무대에 섰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서곡을 시작으로 7곡의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지휘자로 돌아온 것이다. 음대 수업을 참관하던 백씨는 98년 음악대학 작곡과 지휘 전공으로 편입했다. 졸업 후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더 공부했다. 현재 미국에 머물며 객원 지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과학고 를 졸업한 백씨가 지휘자로 급커브를 튼 이유는 뭘까. 그는 “한 번의 경험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포레의 ‘레퀴엠’을 지휘했던 서울대 혼성 합창단과의 무대다. “100여명이 음악의 감동을 함께 느낀다는 전율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아마추어로 시작한 이 동아리 활동에서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백씨처럼 공대의 ‘브레인’이 음악계로 이식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2009 윤이상 작곡 대상’에서 중앙일보상을 받은 김택수(29)씨 역시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서울과학고 재학 당시 호주에서 열린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은상을 받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했지만 집안 형편상 꿈을 접어야했던 그는 끝내 음악을 선택해 서울대 작곡과로 편입했다. 부산시립합창단의 지휘자인 김강규(48)씨 또한 영남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성악과에 늦깎이 입학한 경우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의 줄기세포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고봉인씨는 첼리스트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DNA 모형과 첼로를 모두 좋아했던 그는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다”며 생물학과 음악을 동시에 전공했다. [김경빈 기자]

◆과학과 음악의 공통점=미국 하버드대 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고봉인(25)씨는 아예 과학과 음악을 오가며 공부했다. 주니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뉴 잉글랜드 음악원을 동시에 다녔다. 현재는 하버드대 줄기세포 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세계를 돌며 연주하는 첼리스트다. 카이스트(KAIST) 생명과학과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느 한쪽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 백승희(50)씨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과학과 음악을 똑같이 사랑했다.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고 깨우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분야 모두에서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처럼 음악계의 ‘과학 두뇌’들은 두 분야의 공통점으로 상상력을 꼽았다. 백윤학씨는 “언뜻 멀어보이는 과학과 음악은 ‘분석적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말했다. 그 역시 길고 복잡한 곡을 쪼개 이해하고 연주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쓰며 음악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과학+음악의 장점=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황병준(42·사운드미러 한국지사) 대표는 지난해 제50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클래식 부문 최우수 녹음 기술상을 받았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러 미국으로 떠났던 황대표는 보스톤 버클리 음대에서 뮤직 프로덕션과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발견한 시점이었다.

그는 “분야를 바꾼 사람들이 이전 경험에서 무엇을 얻느냐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에서 공부할 때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노력을 한 사람이 음악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이다.

김택수씨는 “‘공학도 출신 작곡가’라는 이미지가 한동안 싫었지만 내 장점을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튀는 방향을 예측하는 수학식을 섞어내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으로 ‘윤이상 작곡 대상’에서 상을 받으며 이공계 출신 음악가가 가진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김호정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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