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흡연피해와 국가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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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먼저 이 글을 보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나 간부는 글읽기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드리고 싶다.

역전에 내걸린 '내 고향 담배 피기' 현수막을 바로 없애고, 애향담배 판매운동 같은 것을 중지하라고 지시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자칫 몇 년, 몇십 년 후에는 소송 때문에 재정이 바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흡연피해에 대한 소송이 제기됐다.

스스로 담배를 피울 때는 언제고, 병이 생기니까 국가와 담배인삼공사를 탓한다고 마뜩찮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외국에서는 흡연피해에 대해 담배회사가 패소한 여러 건의 사례가 있고, 최근에는 담배회사의 책임을 더욱 폭넓게 인정하는 경향이므로 엉뚱한 돌출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미 플로리다주 같은 곳에서는 최근 담배로 인한 피해를 본 사람 모두에게 보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을 정도니, 전세계적 흐름은 담배회사 쪽에 점점 더 무거운 책임을 묻는 쪽으로 가고 있다.

여기까진 흥미롭기는 하지만 비교적 간단한 이야기다.

피해자와 담배회사의 다툼은 법리 해석상의 차이는 있을망정 법원 판결에 따라 책임을 묻고 또 지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실정법 해석만 두고 보면 설사 담배 판매의 주체가 국가 혹은 공기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한 쪽 당사자가 국가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흡연피해에 대한 피해보상 소송은 단순한 법률적 다툼 말고도 또 다른 과제들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첫째, 건강에 대한 국가의 책임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다.

적극적으로 내 고향 담배를 판촉하고 공무원까지 동원해 판매책임을 맡기는 일부 지자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흡연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최근의 경향은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쪽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건강에 관한 한 국가의 책임을 매우 폭넓게 정하고 있고, 그 범위는 지금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흡연이 아니라도 국가는 국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척동자도 그 피해를 모를 리 없는 흡연문제에 이르러서야 책임문제는 더 거론할 필요가 없다.

실정법에 기초한 법원의 결정이 어떠하든, 건강정책의 시각에서는 이번 흡연 피해소송 사건에서 국가가 책임을 피해갈 도리는 없다.

두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다.

국민건강을 위해 정부가 담배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루 이틀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지금껏 그 사업을 붙들고 있는 중요한 이유, 그리고 적극적으로 반 (反) 흡연정책을 펴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연히 세수 (稅收)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지자체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지방 보건당국의 금연운동을 억제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담배판매 운동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이때까지 정부는 국민건강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수를 '선택' 해왔다.

아직까지도 정부, 특히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선택을 바꾸어야 한다.

세수보다 주민의 건강이 우선순위가 더 높아야 하는 것이다.이는 단순히 규범적인 요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손익계산을 봐서도 마찬가지다.

조만간 정부가 흡연피해에 대한 대규모 소송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단기적인 세수 늘리기 정책은 얼른 포기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모든 정부정책에서 1차적으로 국민건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의외로 많고 또 넓다.

도로설계와 사고, 학교 시설기준과 학생의 건강,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과 대기오염의 건강피해 등 비슷한 경우를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이번의 흡연 피해소송 문제도 결과는 건강상의 피해로 나타났지만 결국 정부의 담배정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건강을 포함해 지금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가치들을 놓고 정책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정책은 이제 그 접근법을 근본부터 달리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단선적 접근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즉 건강.환경.안전.복지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번의 흡연피해 소송은 호사가들의 좋은 화젯거리 이상의 만만치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소송이 정부가 정책에 접근하는 기존의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돼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 건강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고, 정책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하며, 진정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의 필수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기회로 활용돼야 할 것이다.

김창엽 서울대 의대교수. 의료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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