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詩碑是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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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방후 이 땅에 최초로 건립된 문학비는 1948년 3월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李相和) 시비다.

수필가 김소운 (金素雲) 이 앞장서고, 대구의 '죽순 (竹筍)' 문학동인의 협조로 세워진 이 시비에는 상화 (尙火.이상화의 호) 의 대표작 '나의 침실로' 첫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시비가 세워지게 된 곡절이 있다.

김소운 자신의 회고다.

일본에 거주하던 그는 해방되던 해 3월 만주에 갔다가 평북 영변의 약산 (藥山)에 며칠 머무른 일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문득 김소월 (金素月) 의 시 '진달래꽃' 의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는 구절을 떠올리고 '이곳에 소월의 시비를 세웠으면'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원고료 등 꽤 많은 돈을 잡지사에 맡긴 채 훗날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한데 해방후에는 남북 분단으로 김소월의 시비를 세울 수 없어 상화 시비에 착안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日帝)치하에서 김소운과 이상화의 상반된 입장 차이를 감안하면 상화 시비가 건립된 데는 어떤 심정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음직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화는 여러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 때 고초를 겪은 대표적 민족시인이며, 김소운은 일본의 연합함대사령관 국장 (國葬) 때 조시 (弔詩) 를 쓰는 등 친일 문학활동으로 훗날 구설수에 올랐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소운이 상화의 시비 건립에 앞장선 것은 다소간 속죄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물론 김소운의 전력 (前歷)에도 불구하고 상화의 시비 건립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과거 흠집을 얼마쯤 씻어줬는지도 모른다.

예술인의 사람됨과 작품을 동일시해야 하느냐, 별개로 봐야 하느냐에 대해서

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지난날의 잘못은 가급적 덮어주고 작품만으로 평가하자는 견해에도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요즘 하남시에서는 작고한 여류시인 모윤숙 (毛允淑) 의 시비 건립을 둘러싸고 그곳 문화원과 시민단체 간에 논란이 뜨겁다고 한다 (본지 9월 4일자 23면) .그녀의 대표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가 '탁월한 전쟁서사시며 지금의 하남을 연고로 하고 있다' 는 것이 건립하자는 축의 주장이고, 역시 그녀의 친일 행각을 문제 삼는 것이 반대하는 축의 입장이다.

이광수 (李光洙) 등 '친일' 로 꼽힌 문인들의 문학비도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그야 어쨌든 시 '국군은…' 의 가치만을 따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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