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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cover story] 더욱 젊어진 ‘런던’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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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타일로 유명한 런던의 백화점 리버티와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함께 만든 스카프. 런던 패션 위크 기간 동안 리버티 백화점에서 전시, 판매됐다. (아래 사진)

딱딱한 군복에서 시작된 트렌치코트가 퍼프소매와 파스텔 톤 컬러를 특징으로 하는 소녀풍 옷으로 변신했다. 점잖은 노신사의 스웨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가일 체크는 젊은 여성의 섹시한 드레스 위에 등장했다. 9월 18일부터 23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열린 ‘패션 위크’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올해는 런던 패션 위크가 25주년을 맞는 해다. 파리, 밀라노, 뉴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션 도시로 런던이 다시 주목받기 위해 이 기간 동안 런던 패션 업계는 다양한 화제와 볼거리의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

첫 번째 화제는 런던에서 시작되고 성장했지만 산업 여건상 런던을 떠나 있던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돌아왔다는 점이다. 1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 ‘버버리’와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이하 프링글)’는 물론 매튜 윌리엄슨, 루엘라, 안토니오 베랄디, 조너선 선더스 같은 디자이너들이 모두 런던에서 2010년 봄·여름 옷을 선보이는 화려한 패션쇼를 열었다. 이들은 체크 등의 영국 전통 패션 코드를 재해석한 현대적인 디자인을 대거 선보였다. 이는 런던이 패션 도시로서 새롭게 변모하는 데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들의 쇼는 ‘보그’ 미국판 편집장 애나 윈투어를 비롯해 귀네스 팰트로, 리브 테일러, 빅토리아 베컴, 장만위(張曼玉) 등 패션계 유명 인사들을 런던으로 불러 모으는 역할도 했다.

둘째로 주목할 만한 점은, 크고 작은 갤러리로 빼곡히 들어찬 예술의 도시답게 ‘패션과 현대미술을 접목한’ 독특한 이벤트가 많았다는 점이다. 패션 디자이너인 폴 스미스와 크리스토퍼 베일리, 수퍼 모델인 나오미 캠벨, 미술가 데이비드 슈리글리 등 영국을 대표하는 25명의 창조적 인물들이 직접 디자인한 25개의 아트 포스터가 런던 지하철과 거리에 전시됐던 행사가 대표적이다. 런던 시장 보리스 조핸슨은 “런던은 지금껏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양산해 왔다”며 “창의적인 디자이너와 예술가, 스타일 아이콘들이 협업을 이루고 그 매력적인 결과물을 보여 주기에 런던은 최적의 장소”라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글 런던=서정민 기자
사진 런던=이부경 프리랜서

2010 봄·여름 ‘런던 패션 위크’발랄한 트렌치코트의 행진

올해 성대하게 치러진 ‘런던 패션 위크 25주년’은 사실상 런던을 다시 패션의 도시로 부활시키자는 목적이 강했다.

런던은 1960년대 모즈 룩, 70년대 펑크 룩 등 과거 주요한 트렌드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런던 패션 산업은 흔들리고 있다.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매퀸의 뒤를 잇는 영국 출신의 스타 디자이너가 배출되지 못했다는 점과 계속되는 경제 불안정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 신진 디자이너 그룹이 하나둘 런던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열리는 뉴욕, 밀라노, 파리 패션 위크에 참가했다. ‘전통’은 신뢰감과 동시에 보수적이라는 느낌도 들게 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영국의 전통에서 한발 떨어져 현대적인 감각을 우선 보여 줘야 했고, 그렇다면 런던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예술’로서의 패션보다는 ‘산업’으로서의 패션이 중요했던 것도 런던을 떠난 이유 중 하나다. 참가하는 디자이너 수가 줄면서 기자와 바이어의 발길도 줄었다. 새롭게 발표한 옷을 홍보해 주고 사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데 저 혼자 열리는 패션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4대 컬렉션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적었던 런던 패션 위크는 지난해 뉴욕 패션 위크와 일정이 겹치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참가 인원이 현저히 떨어진 것. 언론으로부터 ‘패션 도시로서의 영향력이 베를린보다 떨어진다’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브라운 총리부인도 패션쇼 찾아 응원

런던의 유력 패션 인사들은 패션 위크 25주년을 계기로 이런 위기설을 불식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런던 패션 위원회가 런던을 떠났던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돌아오도록 설득했다.

영국 총리 부인인 세라 브라운은 런던을 찾은 유명 인사들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고 적극적으로 환대했다. 그는 “영국이 패션 산업을 다시 이끌 수 있음을 믿는다”며 “정부가 이런 창의적인 작업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세라 브라운은 스타일은 화려하지 않지만 영국 패션계에서 공짜 선물은 절대 안 받고, 모든 것을 직접 구매하기로 유명하다.

크리스토퍼 케인의 ‘체크와 비즈의 조화’

버버리는 ‘전통’의 양면인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 2000년 최상위 브랜드인 버버리 프로섬을 밀라노 컬렉션에 선보였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밀라노에서 브랜드를 전개해 왔다. 그런 버버리가 10년 만에 런던에서 쇼를 연다는 것은 큰 화제를 불렀다. 덕분에 런던 패션 위크 피날레를 장식한 쇼는 ‘보그’ 미국판 편집장 애나 윈투어를 비롯한 패션계 인사들과 스타들을 런던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0년 봄·여름 버버리 프로섬의 패션쇼는 영국의 대표적인 클래식 아이템인 트렌치코트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데 충실했다. 길이는 짧아지고, 어깨는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밑단은 맞주름으로 장식된 소녀풍의 트렌치코트들은 ‘드레스처럼 입는 트렌치코트’라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이번 런던 패션 위크에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킨 또 한 명의 디자이너는 크리스토퍼 케인이다. 올해 27세인 케인은 이번이 세 번째 컬렉션 참가다. 그런데 그 반응이 아주 뜨겁다. 케인의 2010년 봄·여름 옷들은 평범한 글렌 체크와 화려한 비즈를 함께 이용해 ‘믹스 매치의 혁신을 불러왔다’는 평을 받았다. 상의는 몸에 꼭 맞고 스커트 자락은 살짝 나부끼도록 해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것도 특징이다. 밀라노의 대표적인 편집 숍 바이어로 ‘10 꼬르소 꼬모’를 운영하고 있는 카를로 소차니 역시 케인의 쇼를 가장 인상적인 쇼로 지목했다. 현재 밀라노와 서울에 위치한 10 꼬르소 꼬모에 케인의 옷들이 입점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 석사과정 동안 발표한 다섯 벌의 드레스가 2005년도 ‘랑콤 컬러 어워드’에 출품된 것을 계기로 케인은 베르사체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활약하게 된다. 현재는 영국의 패스트 브랜드 톱숍과도 협업, 자신의 이름을 건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버버리 프로섬 쇼에 참석한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모델 아기네스 딘과 더글라스 부스 그리고 트위기, 배우 이나영(왼쪽부터)


실루엣 강조한 여성스런 디자인 주목

2010년 봄·여름을 바라보는 영국 디자이너들의 시선은 전체적으로 밝고 긍정적이다. 대표적인 예는 레몬색, 구름색, 여린 이파리색 등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의 파스텔 톤 컬러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허리는 꽉 조이고 히프 부분은 다이아몬드 꼴로 각지게 부풀린 스커트 실루엣도 주목할 만한 트렌드다.

케인의 경우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컬러와 소재, 분위기를 한 데 모아 믹스 매치했다는 점도 런던 패션 위크 의상들의 공통점이다. 매튜 윌리엄슨은 강한 색깔과 화려한 장식을 주로 사용하는 디자이너인데 이번에도 상의는 화려한 비즈, 하의는 깔끔한 실크 소재를 매치한 옷들을 선보였다. 속옷을 겉옷처럼 입는 로맨틱한 분위기의 옷도 많았다. 루이스 골딘의 경우는 마돈나를 위해 장폴 고티에가 만들었던 ‘콘브라’를 응용한 디자인을 내놓았다.

반면 환상적이고 강렬한 프린트를 선보인 디자이너들도 있었다. 베르사체,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에서 활동했던 42세의 디자이너 킨더 아구지니는 펑크 그룹인 섹스 피스톨스의 거친 감성과 샤넬의 우아함이 결합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환상적인 색깔과 프린트가 조합된 약간 과장된 듯한 그의 디자인은 지금 ‘패션계 샛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10 꼬르소 꼬모의 카를로 소차니가 주목한 또 한 명의 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 역시 대담한 컬러 프린트로 화제가 됐다.

글 런던=서정민 기자

‘아가일 체크’ 현대적 재해석

프링글의 모델 배우 틸다 스윈턴. 영화 ‘나니아 연대기‘로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이란 쉽게 얻어지는 가치가 아니다. 질 좋은 캐시미어를 생산하고 직조 기술을 발달시켜 온 영국의 관록 있는 브랜드들에 이 가치는 남다른 자부심인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로 존재해 왔다. 젊은 층을 사로잡을 만한 새로운 요소, 즉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디자인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5년에 설립 190주년을 기념해 밀라노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던 프링글은 이번 런던 패션 위크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숙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한 브랜드로 꼽힌다.

로버트 프링글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1815년 설립된 프링글은 럭셔리 니트 브랜드다. 역사가 긴 만큼 이루어낸 성과도 많다. 1900년대 초기에 니트를 아웃웨어로 처음 도입했고, ‘아가일 체크’로 불리는 마름모꼴 체크무늬를 최초로 고안했다. 겨울이면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입는 ‘트윈 세트’를 만들어낸 것도 프링글이다. 카디건과 스웨터를 함께 입는 트윈 세트는 진주 목걸이와 함께 클래식한 영국 스타일로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2010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프링글의 의상은 바로 이 ‘니트, 아가일 체크, 트윈 세트’ 등의 클래식한 요소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우선, 브랜드의 고유한 상징인 아가일 체크는 기존의 고정관념인 ‘잔잔하고 반복적인 스웨터 무늬’에서 자유로워졌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섬세한 실크 소재의 니트 레이스 원피스에서 아가일 체크는 그래픽처럼 커다란 마름모꼴 모티브로 등장한다.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인 킬트에서 착안한 여러 겹의 레이어드 니트 스커트, 평면적인 니트 조직을 밧줄처럼 굵은 주름으로 꼬거나 버섯 갓의 속살처럼 잔주름으로 다양하게 변화시킨 카디건들도 선보였다.

영국을 대표하는 옷인 트렌치코트도 변형했다. 일반 재킷처럼 길이를 짧게 하고 등판에는 절개를 넣어 ‘여름에도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트렌치코트’를 만들었다. 섬세한 장식과 실루엣은 지극히 여성스러워 보이는데 그 이면, 예를 들어 롱 드레스 등판은 러닝셔츠처럼 스포티한 디자인을 갖고 있는 점도 독특하다. 점잖은 어른들의 브랜드라는 이미지에서 한발 비켜나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재미있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티셔츠도 판매할 예정이다.

수석 디자이너인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2010년 봄여름 의상의 컨셉트를 “영국적인 우아함과 현대적인 스포티 캐주얼을 접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디자인의 영감을 준 사람은 배우 틸다 스윈턴이라고 한다. 올해 50세인 스윈턴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 ‘마이클 클레이튼’ 으로 친숙하다. 지적이면서 우아하고 또 중성적인 느낌도 갖춘 것이 스윈턴의 매력인데 디자이너는 바로 이 점을 디자인에 반영한 것이다. 프링글의 디자인은 서울 청담동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머 가득한 스니커즈, 자유를 신는다”
푸마와 협업 10년째 … 디자이너 미하라 야스히로

런던 패션 위크 기간 동안 열렸던 다양한 행사 중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의 스포츠 브랜드 푸마와 일본인 구두 디자이너 미하라 야스히로의 협업 10주년 기념행사였다.

‘패션과 스포츠의 결합’이라는 주제로 2000년 푸마가 협업을 제시했을 때 미하라는 촉망받는 신인 구두 디자이너에 불과했다. 세계적으로는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 그와의 협업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마야 문명의 재발견, 뉴욕의 작은 바에서 들은 재즈, 지구온난화, 애니매지컬(Animagical) 등 독특한 컨셉트의 스니커즈 디자인을 소개했던 ‘미하라 푸마’ 라인은 두꺼운 매니어 층을 형성했다. 2010년 협업 10주년을 맞게 되는 푸마와 미하라가 런던을 기념행사 장소로 꼽은 이유는 “우리의 도전정신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늘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고, 패션 위크 25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도시가 런던이니까.

패션 위크 기간 동안 미하라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0년 봄여름 미하라 푸마 스니커즈의 컨셉트는.

“10년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뉴 레트로’라고 이름 붙였다. 예전에 내가 선보였던 클래식한 디자인의 MY-6와 2008년 소개된 푸마 우산 스니커즈를 결합했다. 여기에 일본인 그래픽 아티스트 펠리쿤이 창조한 만화 캐릭터 ‘푸마네코’가 덧붙여졌다. 말하자면 복고와 전위적인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이다.”

-또 한 명의 아티스트를 참가시켜 ‘푸마네코’를 만들게 된 배경은.

“푸마네코는 일종의 몬스터(괴물) 캐릭터다. 푸마와 나는 고유한 푸마 로고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좋아할 만한 주인공을 찾던 중 펠로쿤을 만나게 됐다.”

-구두 디자이너가 스니커즈를 만들 때의 장점이라면.

“구두는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형태를 갖고 있다. 장식이 조금씩 달라질 뿐. 그것이 늘 한계로 느껴졌다. 패션이나 스포츠, 어느 쪽도 속하지 않는 자유롭고 재밌는 느낌의 신발을 만들고 싶었다.”

-‘미하라 푸마’만의 개성이란.

“적절한 유머를 겸비한 현대적인 감각을 들고 싶다. 이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겨 신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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