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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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8) 日警의 집요한 추적

나는 하숙집 주변에 있던 경찰의 시선을 피해 잽싸게 골목을 빠져 나왔다.

이때가 1945년 4월 10일경. 나는 다시는 하숙집을 볼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때의 예감대로 결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숙집에서 개성역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였지만 경찰을 피해가느라 1시간이나 걸렸다.

개성역에서는 제복입은 역무원만 봐도 가슴이 덜컹했지만 이렇다할 이상한 조짐은 찾을 수 없었다.

아직 지명수배령이 내리지는 않은 듯 했다.

대합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개성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개성을 제일 빨리 떠나는 열차는 서울행이었다.

검표원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긴 했지만 무사히 열차를 집어 탔다.

저녁무렵 열차는 서울역에 도착했고 간단히 요기를 할 정도의 여유도 되찾았다.

정릉에 있는 동생들에게 갈까도 생각해 봤으나 그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 고향인 북청 (北靑) 쪽으로 가기로 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긁어 모았더니 원산까지의 열차표는 간신히 살 수 있었다.

열차에 올라 구석에 자릴 잡았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자 아침부터 쌓인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앉자마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나는 원산역에 서 있었다.

북청으로 가자니 고향집도 이미 경찰의 감시가 뻗쳐 있을 것 같아 일단 원산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학교 동창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한 뒤 도움을 청했다.

그는 북청 인근에 있는 이원군 (利原郡)에 연로한 자신의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며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 친구에게 북청 고향집에도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그길로 이원군 이원읍내에 있던 친구 할머니댁을 찾아가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못된 어느날 경찰이 들이닥치고 말았다.

나는 다락방에서 '이제 죽었구나' 하며 숨죽이고 있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날 부르는게 아닌가.

아버지였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동원아! 네 어머니가 지금 경찰에 잡혀가 고생하고 있다. 게다가 어머니 건강이 말이 아니니 네가 고생 좀 해야겠다. " 경찰이 어머니를 잡아간 뒤 아버지를 앞세워 나를 자수하도록 공작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어머니, 죄많은 자식을 용서하세요' 하고 되뇌이며 다락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아버지 옆에 서있던 경찰이 잽싸게 달려들어 나를 포승줄로 묶었다.

아버지는 경찰이 나를 끌고 가려하자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아버지는 눈물이 맺힌 당신의 눈을 자식에게는 애써 감추며 나를 부등켜 안았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일본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고생하거라. 하나님이 곁에서 늘 지켜주시고 계시니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교회 장로로 활동할 만큼 강한 아버지의 신앙은 여기에서도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형사들이 몰고온 자동차로 원산으로 갔고 다음날 열차편으로 서울로 왔다.

광화문 총독부 근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쉴틈도 없이 취조실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야, 너 항일투쟁 함경도 학생조직원이지?" 하고 일본 형사가 물었다.

처음 들어본 얘기라 내가 '잘 모르겠다' 고 대답했더니 눈에 불이 번쩍했다.

주먹이 연방 얼굴에 날아왔고 코피가 터졌다.

일본 형사는 좀 미안했던지 "그놈,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쯧, 쯧, 쯧…. " 하며 혀를 차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다른 형사 2명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말도 없이 곁에 있던 죽도 (竹刀) 로 몽둥이 찜질부터 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나를 수돗가로 데려가 물을 먹이더니 배에다 발길질을 해댔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머리에 쇠똥도 안벗어진 놈이 아주 죽을려고 환장했구만. " 한국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 고등계 형사들임이 분명했다.

글= 임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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