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목조문화재 해충경보] 들끓는 흰개미 방제 팔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목조 문화재들은 흰개미 등 해충 침해 및 습기 등 자연적 요인들뿐 아니라 점검.관리소홀과 마구잡이식 개.보수 등 인위적 요소에 의해서도 크게 훼손되고 있다.

◇ 극성 부리는 흰개미 = 경남 양산의 통도사 약사전 (유형문화재) .지름 50㎝, 높이 3m 정도의 기둥 8개 중 5개가 흰개미의 공격을 받았다.

밑둥을 갉아먹은 뒤 오른쪽 기둥은 주춧돌과 기둥 사이에 손이 들어갈 정도의 틈이 있었으며 위쪽 왼쪽귀퉁이 기둥은 손 닿는 부분까지 속이 비어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났다.

이같은 흰개미 피해는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심했지만 전국 어디서나 발견됐다.

1920년 일본인 조사에 따르면 당시 흰개미 서식지역은 충남 등 서부 일부 지역뿐. 그러나 지난해 산림청 임업연구원 조사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흰개미가 발견돼 분포 및 그에 따른 피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상황이 이런데도 흰개미로부터의 문화재 보호 수준은 극히 미흡하다.

일부 문화재는 흰개미가 살기 좋은 습기찬 환경까지 만들어주고 있을 정도. 건물 내부 바닥에 비닐장판을 깔아놓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 바닥에서 올라온 습기로 눅눅해진 기둥은 흰개미에게 최상의 먹이가 된다.

국보 14호인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바닥에 약 1㎝ 두께의 스펀지를 깔아 습기가 건물 내부 기둥쪽으로 집중 방출되고 있다.

밀양대 박현철 (朴賢哲) 교수는 불단 왼쪽기둥을 조사한 뒤 "기둥 안을 들여다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두드렸을 때 안이 빈 소리가 나고, 표면이 축축하게 젖은 것으로 미뤄 현재 이 기둥을 흰개미가 파먹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은해사측은 흰개미는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습기제거를 위해 기둥 밑 주춧돌에 휴지를 깔고 제습제를 갖다 놓는 정도의 조치를 취했다.

朴교수는 "이대로 놔두면 흰개미가 기둥은 물론 옆의 탱화도 갉아먹을 수 있다" 고 말했다.

임업연구소 이동흡 (李東洽) 박사는 "문화재관리국에 등록된 목수들조차 흰개미 피해사찰을 개.보수하면서 흰개미가 먹고 있는 목재를 사용할 정도로 흰개미에 대해 무지한 상황" 이라고 말했다.

취재과정에서 불국사 백운교 앞의 죽은 나무, 부산 범어사 종루 옆 벚나무, 안동 봉정사 숲속의 죽은 나무를 흰개미가 쏠고 있는 것이 발견돼 근처 문화재에 대해 흰개미 대비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 실효없는 점검 = '98년 12월 11일 - 이상 없음. 99년 6월 29일 - 이상 없음' .귀신사 대적광전 (보물 826호)에 대한 전북 김제시의 점검일지 내용이다.

그러나 '이상없다' 는 진단과 달리 대적광전은 흰개미 피해로 기둥과 마루가 기울고 보와 벽이 뒤틀려 갈라지는 등 붕괴위험에 처해 있다.

주지 범현스님은 "건물 안전에 문제가 있어 완전 해체.복원을 관할관청에 여러차례 건의했지만 올해 일부 구멍난 마루만 고쳐주겠다고 한다" 며 "보물급 문화재를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느냐" 고 한탄했다.

이에 대해 김제시청 관계자는 "올해 3월 문화재청에서 건물의 기울기 등을 측정한 뒤 당장 쓰러지지는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고 말했다.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은 대들보 가운데가 처지고 이로 인해 갈라짐이 점점 심해지고 있으나 안동시는 이를 모르고 있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일부 기둥 윗부분을 흰개미가 파먹어 약해진 기둥이 지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찌부러진 상태다.

하지만 영천시 관계자는 "지난 5월초 현장점검을 했으며 이상 없다" 고 답했다.

◇ 훼손 부추기는 문화재 수리 = "무늬만 문화재죠. " 고 (古) 건축연구소 대표 A씨의 한탄이다.

수리 때마다 손상된 목재를 교체하는 것이 거듭돼 많은 목조 문화재들이 거의 '새 건물' 이 됐다는 것. A씨는 "문화재 수리의 제1원칙은 옛 재료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지만 많은 수리업체들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 고 말했다.

예컨대 기둥의 일부가 썩어 약해졌을 경우 이를 강화 처리하면 되는데 아예 기둥을 새 것으로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A씨는 "강화 처리를 하면 시간과 돈이 더 들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늑장행정으로 공사기간이 지나치게 빡빡한 것도 문제. 고건축 설계사무소장 K씨는 "4월이나 돼야 당해연도 수리지침이 정해지고, 설계와 예산배분, 공사입찰을 하다보면 장마가 지난 8월에야 수리가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예산을 반드시 그해 써야 하는 경직된 제도 때문에 결국 대부분의 문화재가 8월에서 12월 사이에 수리를 마쳐야 한다" 고 말했다.

◇ 턱없이 부족한 관리인력.예산 = 문화재 관리를 총괄하는 문화재청에 건조물 관리 전담인력은 4명. 전국 1천여 건조물을 수시로 일일이 점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때문에 현장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일은 각 지자체가 맡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에는 고건축 전문가들이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철저한 점검은 기대하기 힘들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매년 지자체로부터 요구되는 수리금액은 약 5천억원. 그러나 올해 수리 관련 예산은 9백89억원이다.

따라서 긴급성에 따라 일부만 보수를 한다.

결국 순서에서 밀린 문화재는 오랫동안 비가 새는 부분을 천막으로 덮어놓는 등 국보.보물로서의 '체면을 구긴' 채 대기해야 한다.

봉정사 종무담당 성묵스님은 "보물 55호인 대웅전은 비가 새고 썩어들어 97년 수리를 신청했으나 올해 예산이 배정됐다" 며 "지난 4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봉정사를 찾았을 때도 비닐천막으로 대웅전을 덮어놓은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고종관.이영기.권혁주 기자, 문화부 김국진 기자

제보전화 02 - 751 - 5222~7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