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강제 불임수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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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럽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생긴 마찰의 절반 이상은 제국주의자들이 열등 인종과 그 영토에 대해 '문명을 위한 수탁자' 의 역할을 떠맡겠다고 나선 데서 비롯됐다. "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보고 있다.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병합, 강압적인 통치의 명분이었다는 것이다.

나치독일이 일으킨 2차세계대전도 게르만족의 우월성으로 열등민족을 지배해 말살시키자는 히틀러의 뒤틀린 야망에서 비롯됐다.

히틀러는 모든 우생학적 과학을 총동원해 지구상에서 인류문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저항만을 일삼는 무리들의 씨를 말리고, 왕이나 최고지도자들에게만 맹목적으로 충성을 서약하는 건강하고 키가 크며 푸른 눈의 금발인 인종만을 살아남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말살정책의 배경은 차원이 좀 다르다.

유대인의 높은 정신사 (精神史)가 독일문화의 재생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유대인 지배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히틀러는 외쳤다.

"독일정신의 빗자루로 이것들을 깨끗이 쓸어내야 한다. " 본격적인 대학살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치가 경계한 것은 유대 인종의 증가였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막기 위해 나치는 유대인 남녀의 합방을 금하는가 하면, 남녀 닥치는 대로 불임수술을 자행했다.

그것이 한계에 이르고 더 이상의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자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한데 히틀러의 발상과 유사한 강제 단종 (斷種) 행위는 현대사회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가 특수한 도덕적 자질이나 감각의식, 그리고 사고방식 등을 전승한다는 데 강한 신념을 가진 일부 맹신적 인종학자들 탓이다.

정통과학의 입장에선 생명공학을 무시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칫 생명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두어 해 전엔가 스웨덴에서 시작된 '강제 불임수술 파문' 이 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 등 북유럽 일대로까지 확산돼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하지만 한 국회의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0개 정신지체 장애인 시설에서 이미 지난 85년부터 60여명의 정신지체인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감행했다고 한다.

현대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는데 다른 방법은 찾아보지도 않고 단순히 유전질환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비인도적인 행위가 저질러질 수 있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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