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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박정희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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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희의 얼굴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명암이 뚜렷하다. 성취와 번영의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수치와 변절의 골짜기가 있다. 빛과 어둠의 두 얼굴이다. 박정희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그의 얼굴에 새겨진 굴곡 때문이다. 한쪽 뺨만 보면 경탄스럽고 다른 쪽 뺨만 보면 역겹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은 얼마 전 박정희의 어둠을 살짝 들춰냈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새삼스럽다. 쿠데타로 권력의 정점에 서기 전, 청년 시절의 얘기들이다.

박정희는 스물세살인 1940년, 일제의 꼭두각시였던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만주국 황제한테 금시계를 수여받고 졸업생 답사를 했다. 이 장면은 서울의 극장에서 뉴스 영화로 상영됐다.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3등으로 학교를 마쳤다. 만주 관동군에 배치된 건 44년이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해방이 되자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에 몸을 맡겼다. 46년에 귀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다녔다. 좌익이던 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자 그는 형 친구들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다.

48년 여순반란 사건을 계기로 군내 좌익소탕 작업이 벌어질 때 박정희도 체포됐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에게 구명을 요청했다. 백선엽씨는 회고록에서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는 박정희 소령"이라고 했다. 그때 군 지휘부가 박정희를 살려준 명분은 '군 내부의 적색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한 공로'였다. 박정희가 배신자라는 주장의 근거다.

이게 박정희의 친일과 좌익, 변절의 기록이다. 박정희의 빛은 이런 어둠에서 나왔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어둠 때문에 그가 발산하는 빛까지 외면해선 곤란하다. 그의 빛은 빈곤탈출과 자주국방이다. 나라의 생존체제가 그때 갖춰졌다. 박정희 이후의 민주화 가치와 국민적 자부심은 견고한 생존체제에서 자라난 꽃이다. 어두운 구석은 밝혀 드러내되 껴안았으면 한다. 박정희의 빛은 모두가 자랑스럽게 공유했으면 좋겠다. 참, 빛에 눈이 멀어 그의 어둠마저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꼴불견도 조심했으면 한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