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정치거품' 걷어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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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3주 동안 독일로 외유하는 바람에 우리 신문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 신문을 보면서 나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곧 우리의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현실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란 매체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신문이 가리켜주는 방향으로 현실을 보고 해석하고 반응한다.

그래서 정작 그 현실을 가리켜주는 '손가락' 인 신문 자체를 의식하기 어렵다는 점도 인식해야 했다.

'옴부즈맨' 이란 바로 그 손가락을 바로 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제대로 방향을 가리키는지, 그 손가락이 지시하는 의미가 바로 짚이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몇달 동안의 옴부즈맨 일을 돌이켜보면서, 그리고 때마침 중앙일보를 비롯해 우리나라 신문을 2천페이지 이상 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기회로 우리 신문 일반에 대한 불만을 정리해 보고싶다.

우선 우리 신문이 너무 많은 지면을 정치에 할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치는 으레 신문의 첫 면을 비롯해 앞부분 여러 페이지에 걸쳐 보도된다.

우리의 사회.경제 전반이 간섭.조종당하고 시민의 일상까지 영향받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언론과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고 중요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갖는 불만은 신문이 다루는 그 정치가 국민에 대한 정책보다 오히려 정치인과 정당의, 그러니까 정치권 내부의 동향과 내막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끼리 하는 그들만의 말과 행동은 사실상 의미가 없거나 무시해도 좋은 것이 상당함에도 그것들을 지나치게 자세하고 길게 과장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마도 신문이 정치를 다루는 시각을 크게 바꾸고 가십성 기사들을 줄인다면 우리의 정치 혐오감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다음 흑막과 이면을 중시하는 보도태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들에 대해 정론적인 해설과 비판을 가하기보다 흥분해 균형감각을 잃고 선정적으로 다루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신문의 '하이에나성 (性)' 에 대해 잦은 지적이 있었지만, 무언가 꼬투리가 잡히면 그것과 관련없는 일들까지 프라이버시를 침해해가며 가혹하게 폭로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독자들이 그런 폭로성 보도에 쾌감을 느끼고 신문은 그런 독자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더욱 폭로성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신문의 그런 보도태도는 독자들의 반응을 그처럼 달구면서도 오히려 사건을 일과성 화제로 의미를 줄이는 역효과를 빚으며 독자들의 상투적인 생각과 고식적인 반응을 유도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 신문에 뉴스는 있되 리뷰 (review.비평) 는 없고 작품은 나오되 평가가 부연되지 않는 비평정신의 취약성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숱한 예술.학술 행사의 발표.전시회가 소개되고 있지만 그 동향에 대해서는 추적이 없어 그것들의 문화적 성과를 갈무리할 의미 부여에는 상당히 소홀하다.

외국 신문 문화면의 대부분이 리뷰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문화적 비평작업의 취약성은 깊이 반성해볼 대목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대목은 우리 신문들의 지면 구성이다.

우선 광고면의 비중이 지나치게 큰 데다 '오늘의 운세' '영어와 일어' 등 대중지에나 적합한 내용도 많다는 점이다.

우리 신문은 너무 많은 지면을 발행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풍부한 지면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아직 부족한 것일까.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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