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93.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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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1장 조우

희숙이가 메모해 둔 연락처로 전화를 건 것은 그녀가 서문식당으로 달려간 뒤였다. 물론 한철규와 통화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전화로나마 그와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착신신호가 오래 울린 끝에 마침 전화를 받는 사람은 한철규가 아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박봉환이가 찾았던 사람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태호의 행방이었다. 한철규를 바꿔 주었을 때, 말문 열기가 아무래도 버성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워메, 요 일을 어쩐디야. 누구신지 모르겄소만 태호란 사람 옛적에 종적도 읍시 타관으로 내빼뿔고 없지라. 나가 애랍게 한 번 만난 적은 있지만이라. "

"헤어진 뒤에 연락도 없었습니껴?" "전화 건 분 주소지가 청와대 가근방인지는 모르겄소만, 댁도 싸가지 없어라이.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한가지는 세계 제일이라 전화 걸기는 삼베바지에 방귀뀌기보다 수월하단 야그는 들었소만, 전화를 걸었으면 건 쪽에서 첨 뵙겠구만요 하고 통성명한 뒤에 물어볼 일이 있으면 물어봐야제이. 잠자는 입에 콩가루 집어넣드키 지 할 말만 따발총 쏘듯 하면 말문 열기가 쉽겄소?"

"거기가 태호나 한철규씨 연락처 맞기는 맞는깁니껴?" "머시여? 연락처란 것을 뻔시리 알고 전화를 걸었을틴디, 나보고 긴가 아닌가를 따지고 들면, 나가 뭔 소리부터 먼저 혀야 쓰겄소?" "아따, 그 양반 억시기 따져쌓네. 나는 박봉환이라캅니더. "

"나는 전라남도 고흥군 토박이 방극섭이오. 나가 듣자니 한철규 선생 일행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디, 그분네들 오늘 새복에 장흥장 장사 나가고 없지라이. 처자슥 먹여살리려면 비오는 날 빼고는 부랄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쫓아댕겨야 쓰잖겄소. 근디 박봉환이라면 나가 어디서 몇 번 들어본 이름인디? 태호하고 중국 갔다는 그 사람 아닌지 모르겄소이?"

"맞습니다. 태호하고 중국 갔다가 이틀 전에 돌아왔습니더. " "그런디. 태호하고 동행으로 중국 갔다 왔으면 그 사람 행방은 거그가 더 잘 알틴디, 뭐땀시 나보고 태호 행방을 묻소? 시방 가만있는 사람 속지르자는 심뽀구만이라?"

"그 양반 억시기 따져쌓게 참말로…. " "이치가 그렇잖소. 거그서 알고 있는 일을 땅 끝에 있는 나보고 묻는 까닭을 알자는 나가 잘못되었소?" "내가 불쑥 나온다는 말이 그렇게 됐뿌렀으이, 양해하시오. 우째됐든간에 장흥장에 갔다는 일행이 돌아올라카머 아즉도 멀었습니껴?" "전화번호나 불러보시요이. 나가 싸게 연락되도록 주선해 볼라카요. "

"방선생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더. " "실례랄 건 없습니다만, 요지간에 한번 만났으면 쓰겄소이. "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인사도 없는 사람에게 한 주먹 쥐어박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난 벌충을 하느라 근력깨나 쏟아부은 지난 밤의 무리했던 합환으로 온 삭신이 녹작지근하고 뼈마디까지 자근자근 씹히는 징조는 가벼운 몸살기운이 분명했지만, 얼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집을 나섰다.

그제서야 고흥으로 직접 연락을 취할 것이 아니라 주문진에 있다는 변씨의 의향을 떠보는 게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식당으로 나가는 길로 곧장 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몇 번인가 되풀이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영동식당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차마 묵호댁이 덜컥 받아서 아까처럼 창피나 당할 것 같아 주저하다가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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