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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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 미국의 반대성명

63년 3월 14일 밤. 버거 대사와의 만찬 도중 朴대통령이 폭탄선언을 하는 바람에 그만 집으로 돌아와 버린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왜 朴대통령을 믿고 따랐던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들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나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만이 가난에 찌든 한국을 구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또 쿠데타를 했으면 뭔가 뚜렷한 업적을 세우는 데 주력해야지 적당히 군에 복귀할 궁리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朴대통령이 하루 빨리 군복을 벗고 선거에 출마해 당당한 민선 (民選) 대통령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 주길 간절히 기대해 왔었다.

내가 朴대통령의 퇴임사 작성 지시를 거부하고 군정연장 선언에 위기감을 느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달 만에 朴대통령은 자신의 민정불참 약속을 뒤집고 군정 (軍政) 을 더 연장하겠다니 나로선 이만저만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15일 새벽 다섯시쯤. 적막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李실장, 어제 저녁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육영수 (陸英修) 여사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陸여사는 "어젯밤 장충동 공관에 대통령 측근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축제 분위기였는데 李실장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고 했다.

그러면서 공관으로 좀 와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즉시 공관으로 달려갔다.

현관에 들어서니 陸여사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난 밤 미 대사관저에서 있었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 陸여사는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고 물었다.

"우선 버거 대사의 목이 달아나지 않겠습니까.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 는 말이 있듯이 정권유지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陸여사가 "정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느냐" 고 묻길래 "망하는 거죠" 라고 한마디로 대답했더니 "망하면 어떻게 되느냐, 애기 아빠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고 다시 물었다.

"각하 믿고 한강다리 건너온 사람들, 저 같이 각하 밑에서 일한 사람들 모두 잡혀서 죽거나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 " 陸여사 표정은 벌써 굳어져 있었다.

그러면서 "애기 아빠가 잘못돼서도 안되고 나라가 잘못돼서도 안된다. 기회가 되면 대통령께 직접 얘기해 보자" 고 말했다.

그날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마침내 3월 16일. 군 장병 80여명은 최고회의 건물 앞에 모여 군정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최고회의는 '향후 4년간 군정을 더 연장할 것이며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 는 내용의 군정연장 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주요 신문들은 사설을 중단함으로써 항의를 표시했고 윤보선 (尹潽善).허정 (許政) 등 야당 지도자들은 산책시위에 나섰다.

미 국무부도 마침내 군정연장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급히 미대사관의 하비브를 찾았다.

그는 정치담당 참사관에 불과했지만 백악관과 국무부에 많은 채널을 갖고 있는 파워맨으로 사태수습에 적임자였다.

그날 저녁 한 요정에서 만났더니 그는 한국상황을 워싱턴에 보고하느라 이틀째 밤을 새워 이미 파김치가 돼 있었다.

내가 "우리끼리 한번 해결해 보자" 고 했더니 하비브는 "나하고 해결할 게 하나도 없어. 한국이 폭탄선언을 했으니 너희가 결정할 문제 아니냐?" 하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나는 "미국이 한국을 너무 몰아붙이면 朴대통령을 더욱 자극해 사태만 악화될 것이다. 결국 케네디 - 박정희간 자존심 대결로 비화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제서야 하비브도 내 생각을 이해했다.

나는 미국이 더 이상 강경하게 나오지 않도록 막아줄 것을 부탁했고 그도 쾌히 승낙했다.

하비브는 워싱턴 요로의 막강한 인맥을 동원했고 미국측 반응도 다소 주춤해졌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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