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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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1장 조우 ①

박봉환과 손씨가 귀국한 것은 인천항을 떠난 지 20여일을 보낸 뒤의 일이었다. 출발할 때는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잠행 (潛行) 으로 떠났지만, 돌아올 적에는 나보란 듯이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그러나 행색은 초라했고 눈자위가 휑하니 수척해 있었다. 귀국한다는 통지를 받은 두 여자는 앞다투어 대전으로 나가 뜨거운 목욕물에 묵은 때를 빼고 고급 미장원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목욕탕 같은 곳은 다녀오지 않은 듯 시치미 뚝 잡아떼고 각자의 집에서 돌아올 남자들을 기다렸다. 돌아올 날짜가 확정되자 비로소 기다림에 대한 오묘한 맛을 음미할 만했다.

뚜렷한 기약도 없이 무턱대고 기다려야 했을 때는 까닭없이 분통 터지고 하루하루가 물어 비틀고 싶도록 지루하기만 했었는데, 지정된 귀국날짜를 두고 남편을 기다려 보니까 꽤나 흥분되고 스릴까지 만끽할 수 있었다.

더운 날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집에 가만 앉아 부채질을 멈추지 않는데도 긴장감까지 덮쳐 사타구니에 땀이 배어났다.

그런데 사타구니에 땀이 배어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사내들이 게걸스럽게 껄떡거리며 헤집고들 곳이란 아내의 육덕뿐이란 것을 알고 대전까지 나가서 땟국을 박박 밀어 두었는데, 사내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그곳에 자꾸 땀이 배어나서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전 다녀온 이후로 하루에도 여러 번 뒷물을 해가며 목욕한 흔적이 손상당하는 일이 없도록 정성을 기울인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사내들의 남루하고 처연한 몰골을 바라보는 순간, 대견스럽고 반갑기 전에 울음부터 울컥 쏟아졌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타국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뒹굴다가 돌아온 사내들의 처지에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 것이었다.

벌어지는 옷깃을 애성바르게 여며 주며, 구겨진 소매를 펴 주면서 줄곧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도 가슴 속은 한결같이 허전하기만 해서 자꾸만 곁에 있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은 하루 두끼로 허기를 달래는 고초를 겪더라도 부부가 헤어지지 않는 일거리를 찾아 살고 싶었다.

더욱이나 결혼식 올리자마자 남편을 장삿길로 떠나 보내야 했던 희숙의 심정은 애간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애틋했다. 박봉환이가 서문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희숙은 출입문을 등 뒤에 두고 돌아선 채 그린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한 시간 전에 정거장으로 마중 나갔던 언니가 두 사람을 데리고 식당 술청 안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희숙은 귀먹은 사람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박봉환이가 등 뒤에 다가섰다는 짜릿한 순간까지도 그렇게 등 돌리고 서 있었다.

속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제출물로 철철 흘러주기를 바랐던 눈물이 감질나게 볼을 적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우리 희숙이 언제부터 이마이 이뻐졌노?" 등 뒤로보터 어깨를 끌어안으려는 박봉환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돌아선 희숙은 박봉환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어 비틀 듯이 물었다.

"중국에 여자 있었지?" "야가 뭐라카노? 자는 입에 콩가루 집어넣는다 카디, 불각시에 엄청시런 말을 하네?" "솔직히 털어놔. 여자 없었으면, 지금까지 거기서 뭘 했어?"

"그래, 알 만하다. 내가 늦게 왔다고 니가 속깨나 태웠구나. 나도 칠월칠석 날에 맞차가주고 올라카다가 니가 하도 보고 접어서 정신없이 달려왔다카이 섭섭하디라도 참그라. " 희숙은 그제사 와락 울음이 터져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고꾸라지듯 주저앉았다. 어깨를 감싸안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남편의 체중이 전보다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은 더욱 기세를 더해 쏟아졌다.

이미 관록이 붙은 언니는 희숙이야 놀고 있든 말든 상관 두지 않고 주방에 끓여둔 삼계탕을 넉넉한 큰 주발에 옮겨 담느라 분주할 따름이었다. 삼복 더위 중의 몸 보신으로는 삼계탕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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