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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 1,000원의 사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즘 PC통신엔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나' 라는 제목의 토론과 정부 성토가 격렬하다.

그러나 실은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나' 하는 울분은 지난 해에도 터져나온 바 있다.

96년에 그렇게 큰 물난리를 겪었는데도 다시 똑같은 내용의 물난리를 겪자 터져나왔던 항변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동원할 속담도 없어졌다.

50년만의 정권교체라더니 달라진 게 과연 무어냐고 묻고 싶다.

정말 행정은 너무도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또 있다.

정권 책임자들의 번드르르한 위로의 말과 수해 방지 약속이다.

그러나 바로 지난해의 그 철석 같은 약속을 못 지킨 사람들의 말을 과연 얼마나 믿어야 할까. "96년의 그 수해를 겪고도 다시 일어섰습니다. 지난해의 IMF사태도 이를 악물고 버텨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

재난과 시련을 연이어 겪어 탈진상태가 돼버린 한 상점주인의 울먹이는 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정부가 국민의 눈물을 훔쳐주기는커녕 국민을 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억제하기 어렵다.

지금 수재민의 눈물을 훔쳐주고 있는 건 정부도 아니고 정치인들도 아니고 바로 수재민의 평범한 이웃들이다.

물난리 이후 TV를 켜면 화면 한구석에서는 ARS전화에 의한 미터식 성금 집계표가 거의 한 틈도 쉬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 수재민에게 격려와 사랑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제 출근하면서 한 TV의 집계액을 봤더니 21억원을 넘고 있었다.

하루 한 전화번호로는 1천원밖에 할 수 없다는데 모금액이 한 TV에서만 21억을 넘었다면 도대체 몇 집에서 전화를 한 것일까. 참으로 엄청난 호응이다.

한 번에 5천원, 1만원씩 보낼 수 있는 방안은 왜 마련 안하느냐는 항의 아닌 항의도 방송국에 줄을 잇는다고 한다.

수해 이전에도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 '힘내세요, 사장님' 등과 같은 TV프로를 시청할 때면 적어도 두번은 울먹거리게 되곤 했다.

이들 프로의 진행자가 이따금씩 토로하듯이 이 사회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먼저 그 사연에 눈시울을 적시게 되고 그런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쉴새없이 ARS 집계 미터기를 올리고 있는 이름 모를 그 많은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지난 97년 미국 CNN방송의 창업자이며 언론기업인 타임 워너사의 회장인 테드 터너가 난민구호 등 유엔의 활동을 위해 10년간 매년 1억달러를 내놓겠다고 발표해 전세계적인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미국 인디애나대의 레슬리 렌코우스키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글을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바 있다.

"터너가 약속한 10억달러는 단일 자선기금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부 행위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는 부유층이 아닌 사람들로부터의 '작은 기부' 라는 자선의 가장 중요한 출처를 잃을 위험이 있다. …자선에 대한 미국 전통의 뿌리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이웃을 돕는 데 있다. " 우리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인.기업인들로부터의 거액 성금도 물론 수재를 당한 사람을 돕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만이 재기의 용기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1천원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고 있고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거액의 성금 이상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고무해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이 많기는 한데 그 정이 미치는 범위가 혈족이나 친지와 같이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TV의 ARS 모금에 밀물처럼 닥치는 온정을 보면 그런 비판은 한참을 빗나간 것이다.

우리들은 아픔을 당한 이웃을 도울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럴 준비도 돼 있다.

다만 사회에 그 도움과 위로의 창구가 되는 경로가 마련돼 있지 않아 도울 수가 없었을 뿐이다.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의 선의를 효율적으로 결집시켜 큰 힘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그것에 너무 등한했다.

국민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의를 조직하는 것이야 말로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며 그런 사랑과 선의야말로 더불어 사는 복지사회를 향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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