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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그린벨트 어떻게 생겼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71년 6월 12일. 김의원 당시 건설부 국토이용관리관은 朴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도로국장과 함께였다.

집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와 있었다.

朴대통령은 먼저 도로국장을 질타했다.

"도로가 왜 서울시 경계까지만 넓고 경기도지역은 좁아. " 朴대통령은 수도권 11개 방사선 도로를 일일이 도면에 그려가며 병목 (bottleneck) 현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대통령은 어디서부터 도로폭이 좁아지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수도권 각 도로의 병목현상을 파악해▶해결대책을 시기.예산.소관분담 등 구체적으로 마련하고▶접도구역 (接道區域) 을 설정해 건축행위 등을 제한할 것 등의 지시가 도로국장에게 떨어졌다.

다음은 김의원국장 차례였다.

"그린벨트란 것 있지. 그것 한번 해봐. " 朴대통령은 도면에 그린벨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시 경계로부터 약 20㎞폭의 원형벨트. 이곳에 건축을 억제해 보존하라는 지시였다.

서울인구가 6백만명을 넘어서고 한해 30만명씩 서울로 몰려들어 땅투기.난개발을 일삼던 때였다.

학자들도 "뭔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하며 주춤거릴 때 朴대통령은 수도권 마스터플랜 - 무분별한 외곽확산을 그린벨트로 막고, 밖에 위성도시를 개발하라 - 의 기본골격을 제시한 것이다.

명령을 받은 金국장은 서울시와 합동작업팀을 구성했다.

영국 런던의 아름다운 외곽 녹지대를 상상하며 2주일 동안 밤샘 작업 끝에 시안 (試案) 을 만들었다.

朴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책상 서랍을 열고 뭔가 보고 와서는 여기저기 추가할 곳을 지시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대통령은 사전에 모 기관을 시켜 수도권 일대의 토지소유 현황을 속속들이 조사해 놓고 있었다.

갈현동.삼송리지역은 당초 건설부 시안에는 없었다.

대통령의 추가지시가 이곳에도 떨어졌다.

金국장이 힘들게 한마디 했다.

"이곳엔 기자촌도 있고…, 앞으로 서울 서북방향 발전축은 이 지역밖에 없습니다만…" . "金국장, 이것봐. 불행한 일이지만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봐. 또 불행히 우리가 밀렸다고 쳐. 어디서 싸우나. 바로 이 계곡이야. 이 지역에 인민군 2개사단쯤 몰아넣고 북한산에서 총공격을 퍼부을 전략요충이란 말이야. 집어 넣어" . 金국장은 아무 말 못하고 물러섰고, 북쪽의 벨트 폭은 30㎞를 넘었다.

朴대통령의 그린벨트는 다목적용이었다.

순식간에 쳤다.

현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5만분의 1지도에 그려진 벨트는 朴대통령의 지시 한달만에 현실화됐다.

관리규정 또한 엄격하게 만들었다.

건설부령 (令) 인 그린벨트 관리규정을 결재하며 朴대통령은 또 한번 의지를 담았다.

"이 규정은 건설부령이라 하더라도 개정할 때는 필히 대통령 결재를 득한 후 수정할 것" 이라는 친필 부기를 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개 부령 (部令) 인 그린벨트 관리규정은 법 (法) 이상의 권위를 갖게 됐고, 그린벨트 업무는 대통령이 직접 관장하는 업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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