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약세, 개입의 유혹을 견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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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호 30면

후지이 히로히사 일본 재무상이 취임한 지 2주도 되지 않아 ‘일본 주식회사’를 화나게 했다. 잘하는 일이다.

그는 드러내놓고 엔화 약세를 지지하지 않았다. 당국자의 눈짓·손짓·발짓으로 움직이는 외환시장에서 그의 태도는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의 강한 달러 정책에 비견된다.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아시아에도 좋은 것이다.

현재의 엔화 강세는 단기적으로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본은 세계 경제위기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수출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엔화 약세는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후지이 재무상의 외환정책 스탠스는 냉정한 현실인식을 반영한 것일지 모른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일본은 더 이상 개도국처럼 환율로 득 보는 짓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부강한 일본이 환율로 득을 본다면 한국이나 싱가포르가 따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국·한국·태국 등의 당국자들은 오래전부터 일본이 환율을 움직인다면 자기네도 환율을 움직일 때 정치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점을 시사해 왔다.

문제는 후지이 재무상이 정치적 압력을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 야당이 된 자민당의 압력도 있겠지만 여당인 민주당에서 수출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압력을 가한다면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그들은 엔화 강세가 수출 경쟁력과 기업의 이익을 갉아먹어 세계 경제가 회복할 때 일본만 뒤처질 위험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울 것이다.

일본은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초대 재무장관이던 폴 오닐은 2002년 “훌륭한 최고경영자(CEO)는 환율에 죽고 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미국 수출기업들은 처음엔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이 적응했다. 일본은 자산가격 거품이 꺼진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런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분위기다.

최근 취임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지난 20년간 전임자들과는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 자민당은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고, 엔화 약세로 ‘일본 주식회사’의 부를 지키려고 했다. 하토야마의 민주당은 일반 소비자의 구매력 향상을 추구한다.

기업의 이익 보호는 최근 세계적으로 대유행이다. 자유시장 경제의 이념적 보루였던 미국도 나을 게 없다.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파산 위기에 놓인 일본항공에 공적자금을 지원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일본항공은 지난 20년간 일본 경제를 고통스럽게 했던 ‘일본병’의 축소판이다. 일본항공이나 일본 경제나 대규모 부채로 신음하는 것은 같다. 더구나 일본항공에는 과거 일본에 만연했던 정경유착이란 고질적 문제도 남아 있다.

후지이 재무상의 외환정책 스탠스가 신선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환율은 충격을 흡수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본에선 경제의 약점을 숨기는 데 환율을 이용했다. 이런 전략은 이제 막을 내렸다. 일본과 아시아 다른 나라를 위해 대단히 좋은 소식이다. 일본은 금융 시스템 운영에서 아시아 다른 나라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것은 좋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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