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가정의례준칙 다시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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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 언론보도에 따르면 결혼식 축의금에 드는 돈은 연 3조여원이고 결혼식 비용에 드는 돈은 우리 정부예산의 15%인 12조2천억여원이나 된다고 한다. 실로 기가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인륜지대사는 될 수 있으면 성대하게 치러야 하고 또 두툼한 축의금을 내는 것이 미풍양속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지도층 인사들의 대부분은 호화예식장에 많은 하객들을 동원해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8월 9일부터 결혼식 영업이 허용되는 서울시내 특1급 호텔에 벌써부터 예약문의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상부상조가 좋은 관습이었으나 '시간이 곧 돈' 인 산업사회에서 이런 호화판 결혼관습이 지속되는 것은 망국의 형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요즘 결혼에 소요되는 돈과 시간은 '죽어 있는 돈과 시간' 으로 변질됐다.

결혼예식에는 살아 있는, 그리고 순수한 돈과 시간이 예물로 바쳐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돈과 시간이 대신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몇년 전에 어느 도시 교육감의 아들 결혼식에서는 '기업형' 에 가까운 자금이 모금됐고, 주로 저명인사들이 모인 인파는 극장가의 인파를 방불케 했다. 또 그들이 거기에서 맥없이 보낸 시간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폐단은 거의 모든 예식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보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결혼예식 문화는 1백80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朴正熙) 정권 때 가정의례준칙이라는 법령이 마련돼 결혼식 축의금에 대한 제재가 있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아 유명무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준법정신마저 흐리게 만든다고 해 결국 폐기됐다.

그러나 그때는 이 준칙이 처음 실시됐고 국민의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효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이 선거때 표를 의식, 이 준칙을 용두사미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의원들이 주례를 못서는 등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정부는 과감하게 새로 가정의례준칙을 마련, 실효를 거둘 수 있게 적극적으로 홍보해 망국의 악습을 미풍양속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나아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시켜 제2의 건국의 기틀이 되게 해야 한다.

이미 선진국들에서는 가족과 친지 등의 극소수 하례객만으로, 또는 결혼 당사자 단둘이서 결혼식을 하고 있다. 이제는 결혼식이 모금의 장이 돼서도 안되고 허장성세의 장이 돼서도 안되는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국민들의 인식을 전환시킬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도모하면 구국적인 성과가 이뤄질 것으로 본다.

이제 결혼식의 망국적인 폐단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무르익어 가고 있으므로 정부.정치인, 그리고 시민이 함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래서 가계를 휘청거리게 하는 그 무수한 '세금고지서' 들을 막고 결혼 당사자들에게는 망신당하지 않을까 하는 하객 동원에 대한 고민을 해소시켜 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상준<한국외대교수.영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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