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친구]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전시장순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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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무덥다고 축 늘어질 수만은 없다. 더위 속에 과실이 여물듯 우리도 가을의 수확을 준비해야한다. 문화.예술인들은 이 여름 더위를 어떻게 슬기롭게 나고 있는지 직접 들어본다.

휴일에 아이들하고 미술관을 돌다 보면 가끔 아는 사람들이 물어온다. "아니, 그림 보는 게 직업인데 쉬는 날까지 그림을 봐요?" 직업상 미술 작품을 자주 본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미술은 여전히 하나의 감동이며 삶의 기쁨이다.

지난 여름 내 발길이 무수한 전시장에 머물렀듯 올해도 내 발걸음은 적지 않은 수의 전시장을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몇몇 곳에서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며 넉넉히 작품을 음미할 것이다. 그렇게 염두에 두고 있는 전시 세 개를 꼽아 본다.

먼저 '우리의 화가 박수근' 전 (호암갤러리) 이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의 평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만큼 그가 좋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술은 위대하고 숭고하다고. 예술가의 고뇌도 그만큼 깊을 수밖에 없다고. 이런 말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칫 무언가 거창하고 기념비적인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 같다.

그러나 박수근은 말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 " 작고 소박한, 단순하기에 오히려 더 아름다운 예술. 박수근의 예술은 그런 예술이다.

6.25 월남중 부인과 잠시 헤어져 있을 때 아내가 그리워 눈물로 지새던 '울보 박수근' 의 그 '팔불출 눈물' 이 그의 예술에 얼마나 위대한 힘이 됐는지를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도인으로 통하는 장욱진의 매직 마커 그림도 그 순수함이 진정 아이들만이 온전히 공명할 수 있는 그런 예술이다 ( '장욱진의 색깔 있는 종이그림' 전, 갤러리현대) .칠하고 긁어내기를 반복했던 유화의 공력이 안 보이는 까닭에 더 천진해 보이는 매직그림들.

어린아이의 낙서같이 뻗은 선들에 까치 호랑이 등 민화에서 자주 보던 소재가 어우러지면서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되뇌었다는 '구호' 가 이들 그림에서 생생히 살아오른다.

"심플하게. "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달관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 금강산을 다녀온 남쪽 미술가들의 작품과 18~20세기 금강산 그림이 함께 전시되고 있는 '몽유금강' 전 (일민미술관.아트스페이스서울) .이 작품들 가운데 겸재니 단원이니 다 제치고 내가 만나는 이마다 가서 꼭 보시라 권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민화 구룡폭' 등 민화로 그린 금강산 그림 두 폭이다. 배운 것.가진 것 별로 없지만 맑고 정하게 삶을 살아온 시골 할머니를 보는 것 같은 그림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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