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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들 없으면, 이젠 LPGA도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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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 여자골프가 세계 최고 무대인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를 접수했다. 한국 선수들은 모든 LPGA투어 대회에서 리더보드 상단을 점령하고 있다. 리더보드만 보면 국내 대회인지 LPGA투어 대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이제 한국 여자골프는 ‘세계 넘버 1’이다. 한국 선수 없는 LPGA투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랭킹 30위 내 한국선수 13명
9월 21일(한국시간) 끝난 삼성월드챔피언십까지 올 시즌 한국은 신지애(21·미래에셋·3승)·지은희(23·휠라코리아)·오지영(21·마벨러스웨딩)·이은정(21)·김인경(21·하나은행)·허미정(20·코오롱엘로드)·최나연(22·SK텔레콤·이상 1승) 등이 9승을 합작했다. 21개 대회에서 9승을 기록, 한국 선수의 우승 확률은 43%나 된다. 두 대회 가운데 한 대회는 한국 선수가 우승한다는 뜻이다. 한국 선수들이 가장 많은 승수를 올린 시즌은 2006년(11승). 올 시즌 남은 대회 수는 6개이므로 2006년보다 더 많은 승수를 기록할 수도 있다. 올해 세계 경기 악화로 7개 대회가 취소된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삼성월드챔피언십까지 LPGA투어 총상금은 3950만 달러. 이 가운데 한국 국적을 지닌 42명의 선수가 LPGA투어에서 벌어들인 상금액은 32%인 1251만1472달러다. 상금 랭킹 30명 가운데 한국 선수만 13명이다. LPGA투어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특히 한국 여자골프의 에이스 신지애는 한국인 최초로 5관왕에 도전하고 있다. 신지애는 ‘올해의 선수’ 부문에서 27일 현재 136점으로 크리스티 커(미국·118점)를 제치고 선두에 올라 있다. 상금 부문에서도 160만 달러로 2위 미야자토 아이(일본·145만 달러)를 15만 달러 차로 앞섰다. 신인상은 거의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다. 신지애는 1344점, 2위 미셸 위는 684점이다.

신지애가 1위에 오르지 못한 부문은 최저 타수와 세계 랭킹. 최저 타수에서 신지애는 커(70.2타), 미야자토(70.328타)에 이어 3위(70.333타)다. 세계 랭킹에서는 1위인 ‘골프여제’ 로레나 오초아(멕시코·10.61점)에게 1.65점 뒤진 2위(8.96)다. 신지애는 남은 대회에 모두 출전할 예정이므로 최저 타수와 세계 랭킹에서도 1위를 노려볼 만하다. 신지애가 상금왕, 올해의 선수, 최저 타수상을 거머쥔다면 1978년 낸시 로페즈(미국) 이후 31년 동안 아무도 이루지 못한 기록을 달성하는 것이다.

미국의 골프 전문지 골프다이제스트의 골프 칼럼니스트 론 시락은 최근 매우 의미 있는 칼럼을 게재했다. 시락은 이 칼럼에서 미국과 유럽의 여자골프 대항전인 솔하임컵을 재편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솔하임컵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대회라면 출전하는 18명의 선수가 모두 LPGA의 상위 랭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롤렉스 랭킹 18위까지 13명이 솔하임컵에 출전하지 않는 선수다. 그중 6명은 한국, 3명은 호주, 둘은 대만 선수이며 멕시코와 일본이 각각 한 명”이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시락은 남자의 라이더컵은 미국과 유럽 선수들이 정상권에 포진해 대회의 권위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솔하임컵은 세계의 대결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안은 “세계 랭킹을 기준으로 미주팀(캐나다·미국·멕시코·남미), 유럽·아프리카팀, 아시아·호주팀 등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이 빠진 대회는 ‘바퀴 없는 자전거요, 단팥 빠진 찐빵’이라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세리 키즈’
박세리는 단신으로 LPGA 무대에 뛰어들어 세계적인 강호들 틈에서 분투했다. 안니카 소렌스탐, 카리 웹, 줄리 잉크스터 등이 전성기의 기량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오초아의 경기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없이 버티고 있는 한국 선수의 숲을 단기필마로 돌파해야 한다. 미국의 폴라 크리머, 스웨덴의 소피 구스타프손 모두 마찬가지다.

21일 끝난 삼성월드챔피언십은 세계 정상급 선수 20명만 출전하는 특급 이벤트 대회다. 그런데 국내 투어 대회처럼 주인공은 5명의 한국 선수였고 오초아, 크리머, 구스타프손은 조연에 그쳤다. 1, 2라운드에서 김송희와 신지애가, 3라운드에서 최나연이 선두에 나섰다. 마지막 날 최나연을 막아선 선수는 일본의 에이스 미야자토뿐이었다. 그러나 미야자토도 우승컵의 주인은 아니었고, 최나연이 샴페인 세례를 받았다.

그동안 삼성월드챔피언십에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한희원 등 고참들 가운데 최소한 한두 명은 출전했다. 그러나 올해는 신지애, 최나연, 김송희, 김인경, 지은희 등 ‘세리 키즈’뿐이었다. 이 중 최고참은 86년생인 지은희였다. 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의 성공 신화를 보며 골프클럽을 잡은 선수들이 11년 만에 LPGA투어의 정복자가 된 것이다.

LPGA투어의 베테랑 잉크스터는 한국 골프의 성장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한 산증인이다. 잉크스터는 “박세리는 한국 골프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박세리는 파워가 인상적이었다. 반면 ‘세리 키즈’들은 주니어부터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파워는 물론 정교함까지 갖췄다. 특히 쇼트게임 실력이 탁월하다. 한국 골프가 LPGA투어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고 말했다.

잉크스터, “한국 선수들 LPGA 강하게 해”
한국 선수들이 지나치게 강세를 보이는 바람에 LPGA투어의 인기가 떨어지고 LPGA 대회가 축소됐다는 주장이 있다. 지난해엔 LPGA투어의 영어 사용 의무화 방침에 대해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한 차별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투어 적응과 스폰서들을 고려한 아이디어로 보는 것이 옳다. LPGA투어는 한국 선수들을 위해 무료로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샬리 홍은 “한국 선수들은 영어 학습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학습 속도도 빠르다”고 말했다. 신지애도 LPGA투어에서 실시하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다. 삼성월드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나연도 시상식장에서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또박또박 우승 소감을 밝혔다. 언론 인터뷰에서도 어려운 질문을 빼고는 영어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잉크스터에게 ‘한국 선수들이 자꾸 우승하면 미국 기업들이 대회 유치를 꺼리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잉스터는 “LPGA투어는 세계 최고의 무대로 전 세계 모든 골퍼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한국 선수들은 LPGA투어에 특혜를 받고 진출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테스트(퀄리파잉스쿨)를 통해 자격을 획득했다. LPGA투어에서 우승하는 데 국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일축했다.

또한 잉크스터는 “훈련장에 가장 먼저 나오고 가장 늦게 들어가는 선수들이 바로 한국 선수다. 한국 선수들의 영향으로 외국 선수들도 열심히 훈련한다. 그래서 LPGA투어 소속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됐다”고 덧붙였다.

잇따른 우승에 동포들도 으쓱
삼성월드챔피언십이 열린 미국 샌디에이고의 토리파인스 남코스에는 많은 동포가 나와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미야자토를 응원하는 일본 갤러리도 많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건 한국 동포들이었다. 한국 여자 선수들의 선전은 동포들의 자부심을 북돋운다.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러 나온 동포 갤러리의 자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국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코스에서 만난 최희영(50)씨는 “15년 전만 해도 골프를 치면 미국인들이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한국인들이 골프를 잘 치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 본다. 지금은 나에게 골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정말 자랑스럽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카멜 마운틴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는 곽용운 사장은 “처음에는 한국 사람이 골프장을 운영한다고 하니까 미국인들이 생트집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클럽하우스에서 파는 라면도 즐겨 먹는다. 특히 얼마 전 메이저 대회인 PGA챔피언십에서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꺾고 우승하자 한국인을 더 대단하게 보는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문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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