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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1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7) 軍도 좌익 몸살

1946년 5월 소위 계급장을 달고 통위부 (국방부) 보좌관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한 나의 눈에 가장 한심스럽게 비친 것은 세상 전체가 온통 좌우로 갈려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인민위원회다, 청년동맹이다, 적위대다 하며 착착 힘을 길러가고 있는데 남쪽은 평화의 허상에 사로잡힌 채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미군정청이 46년 1월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리자 좌익측은 남한군 장악을 위해 비밀리에 국군경비대 안으로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 (李在福) 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15연대장 최남근 (崔楠根) 중령을 비롯, 5여단 참모장 김종석 (金宗碩) 중령, 여수 14연대 지창수 (池昌洙) 상사, 제주 5연대 오일균 (吳一均) 소령, 대구 6연대 곽종진 (郭鍾振) 특무상사, 원주 8연대 표무원 (表武源) 소령 등 전국 각 연대에 마치 거미줄같은 세포조직을 심어놓고 있었다.

공산당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한번은 나에게도 포섭의 손길을 뻗친 적이 있었다.

46년 4월 창경원에서 만주 건국대 동창생들이 모여 벚꽃놀이를 겸해 동창회를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朴모라는 젊은 사람이 앞으로 나서더니 큰 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미제국주의자들이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 이렇게 운을 뗀 그의 연설은 지루하게 10여분을 끌더니 "진정한 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민족양심을 갖고 단결해야 한다" 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동창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내가 나서서 "동창도 아닌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와서 떠드느냐" 고 항의를 했다.

그런데 그 후 그 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통위부에 들어가 있는 나를 찾아왔다.

조금 얘기를 나눠보니 그가 찾아온 목적은 한마디로 나를 공산당세포로 포섭해 들이자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뼛속부터 반공주의자요. " 이렇게 단호한 말을 해서 돌려보냈지만 그는 그후에도 몇차례나 더 나를 찾아왔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소문난 나에게까지 이 정도였으니 다른 경비대 장병들을 대상으로한 공작은 오죽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한국 사정에 어두운 미군정청의 판단잘못이 좌익의 군대 침투를 방조한 측면도 있었다.

47년 통위부 인사참모로 재직하던 시절의 얘기다.

평소 좌익들의 활동을 우려하던 나는 경비대 지원병의 경우 모병단계에서부터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를 가릴 수 있도록 신원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규정을 만들어 고문관이었던 프라이스 (Price) 대령에게 제출했다.

그러자 그는 "장병들이 입대할 때 경비대법을 준수하고 명령에 절대복종한다고 선서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며 서류를 방바닥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내가 좀 거친 태도로 서류를 다시 주워 대령에게 건네려 하자 마침 옆에 있던 그의 보좌관이 "싸우지 말라" 며 내쪽을 나무라고 나왔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며 그 방을 나오고 말았다. 군정청의 무지와 군수뇌부의 안이한 판단으로 국군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48년 4월에 발생한 제주 4.3사건에 이어 여수 14연대 반란, 대구 6연대 반란 등 좌익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여수 14연대 반란으로만 모두 1천6백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생각하면 그런 비극이 없었다.

장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49년 5월 춘천에 본부를 둔 8연대 1대대 표무원소령은 야간훈련을 빙자해 대대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넘어가버렸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 있던 나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표소령은 한 때 나의 부하였다.

나는 46년 원주에서 8연대 2대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1중대장이 바로 표무원소위였다.

얌전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월북을 했다니 '모를 것이 사람 속'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강영훈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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