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서해5도는 한반도 후두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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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리는 역사를 그려 넣는 화판 (畵版)'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요즘 서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의 긴장 국면은 역사적으로 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유럽이 한반도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은 1810년대였으며 이 당시에 그들이 조선의 후두부라고 생각한 곳은 해주.인천, 그리고 아산만이었다.

미국과 프랑스가 인천을 주목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킨 곳이 곧 강화 일대였고, 독일은 아산만을 주목했는데 유독 영국은 해주만과 그 일대의 섬을 주목했다.

그러한 관심의 일환으로 1816년에 홀이 이끄는 선단이 이곳을 탐사했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서 제임스 홀 군도 (Sir James Hall Group)' 라고 명명한 일이 있었다.

그후 미국이 한반도의 운명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이 서해 5도를 주목한 것은 한반도의 분할을 구상할 무렵이었다.

1945년 8월을 전후해 미국의 국무부.국방부.정보기관, 그리고 태평양사령부가 각기 한반도 분단의 지도를 그리고 있을 때 유독 국방부 작전국 (OPD) 은 이 서해 5도를 주목해 서쪽 끝은 북위 38도10분 (장산곶)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북위 37도40분 (주문진)에 이르는 서고남저 (西高南低) 의 빗금 (斜線) 을 분할선으로 그렸다.

그들이 옹진반도를 이토록 중요시한 것은 바로 이 서해 5도 때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은 미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해상권이 역사에 미친 영향' (1918) 이라는 명저를 쓴 앨프리드 마한의 논리에 따라

'육지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바다 (섬) 를 잃어서는 안된다' 는 전략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미국의 이와 같은 대극동 전략은 맥아더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곧 애치슨 방위선이었다.

그들은 극동이야말로 늪이므로 육지에 상륙해 '접촉성 피부염' 에 감염되는 일은 가급적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개구리 착지점 (frog jumping point) 처럼 섬을 잇는 고리에 의해 극동을 방위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더라도 섬의 고리를 기지로 한 해상 전략으로 극동에서의 국익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 방위전략이 가장 약여 (躍如) 하게 나타난 것은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장이었다.

당시 휴전선은 육지에만 획정되었을 뿐 해상으로 연장해 획선되지 않았다.

이때 문제가 된 곳이 바로 서해 5도였다.

그런데 이 도서에 대해 공산측과 미국측 사이에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

즉 북한의 대남 전략은 남한의 빨치산과 이를 지원하는 지상군 개념에 몰두하고 있었고 미국은 마한의 전략에 따라 서해 5도를 장악하는 것으로 향후에 일어날 군사분쟁에서 우위를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절묘한 것은 당시 유엔군측의 수석대표는 극동군사령부 함대사령관이었던 터너 조이 제독이었는데 그는 철저한 마한주의자였다.

그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서해 5도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후에 해리슨 중장으로 교체됐지만 이 정신은 그대로 승계됐다.

해리슨은 마한과 같은 의지를 가지고 회담에 임했는데 미국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지 못한 북한의 수뇌부는 향후에 있을 서해 5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유엔군측의 제안에 별 뜻 없이 동의했다.

그 결과 최종 협정서에는 휴전선 조항에 명시돼 있지도 않은 별도 조항 (제2조 13항의 B)에서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道界線) 의 북방 및 서방에 위치하고 있는 모든 도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군사 지휘하에 둔다' 고 규정해 놓고서도, 그 단서에 '단,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는 이 규정에 의하지 아니한다' 고 합의했다.

북한이 이 대목에서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후회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백령도의 정상에 올라 지호지간 (指呼之間) 의 장산곶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목에 비수를 겨누고 있는 듯한 이 지역에 대한 북한의 심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92년에 나는 백령도를 수비하는 해병 여단장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북한이 서울을 함락하려면 이 곳을 먼저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이 함락되면 서울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 그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가 내 무덤이다" 라고.

신복용 건국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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