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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교수 4년만에 새 시집 '토마토는…'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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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허공에 떠 있었다/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시 '안개' )

시인 오규원씨 (58.서울예대 문창과교수)가 4년만에 새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문학과지성사.5천원) 를 펴냈다.

'시' 하면, 열정적 시어에 흠뻑 취할 준비부터 하는 독자에게는 퍽 불친절하게 읽힐 시집이다.

그의 시에는 떡갈나무.갈참나무.방가지똥.메꽃.직박구리.콩새 등 풍부한 자연이 등장하면서도, 지친 도시인이 잠깐 와서 쉬어가는 휴양지 노릇을 한결같이 거부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시인이 그려내는 것은 유유자적한 풍경화가 아니라 단정한 정물화. 소년이든 나무든, 식탁 위 토마토든 깊은 산중 떡갈나무든, 다같이 정물일 따름이다.

인간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같은 태도는 시 '안개' 에서 보듯, 그로테스크한 맛조차 묻어난다.

"나는 시에게 구원이나 해탈을 요구하지 않았다. 진리나 사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시에게 요구한 것은 인간이 만든 그와 같은 모든 관념의 허구에서 벗어난 세계였다. 궁극적으로 한없이 투명할 수 밖에 없을 그 세계는, 물론, 언어 예술에서는 시의 언어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가능성의 우주이다.

(자작 해설중에서)"

일산 자택에서 만난 시인은 자신의 시는 "언어에 의미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려는 것" 이라고 표현했다.

인간 문명이 부가한 인간중심적 의미를 벗겨내고 언어가 지시하는 투명한 실체에 다가가려는 것이 그의 시적 지향점란 설명이다.

시인이 '날 (生) 이미지' 라고 부르는 이 실체의 세계는 탈 (脫) 인간적일뿐 아니라, 탈 (脫) 중심적인 것이 특징. 나무와 숲을 예로 든 그는 "나무는 숲의 부분이나 종속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며 실체인 완전한 개체" 라고 말했다.

한때 대기업 회사원 생활을 하기도 했던 시인은 이 표현이 조직사회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대다수 현대인의 개체적 자각에 대한 비유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세계를 이처럼 개체 중심의 구조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이번 시집에서 시 한 편의 각 연을 다시 한 편씩의 시로 전개하는 실험으로도 나타난다.

시 '시작 혹은 끝' 으로 시작되는 2부의 시 10편이 그것. 숲이 한 편의 시라면, 각각의 연은 나무인 셈이다.

이런 그에게 문학 역시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오롯이 홀로 선 시인들로 이루어진 숲일터.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글동료가 있음을 거듭 자랑했다.

'인간시대' 등 다큐멘터리 방송작가로 이름난 부인 김옥영씨 (47)가 바로 그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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