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음모설'이 나오는 정치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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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사는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란 이유로 그동안 환자로부터 거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존경을 받아왔다.

감히 의사에게 꼬치꼬치 따지는 일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를 의사선생님이라고 불렀다.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 의사와 환자사이의 갈등이 사회문제로까지 되고 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경제발전과 정보통신 및 과학기술의 발달은 일반 국민에게도 어느 정도 전문적인 지식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궁금한 일반인과 자신의 고유영역을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는 전문가 사이의 갈등이 의사와 환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에서도 똑 같은 갈등이 목격되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국가의 시민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재단하고 싶어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왔는지 정치지도자가 확실하게 답변해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근본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서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으며, 금융위기를 겪었던 아시아 국가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런 위기극복을 하는데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민의 동참이 가장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위기에 비하면 매우 사소해 보이는 고위공직자 부인들의 밍크코트 로비사건에 전국이 떠들썩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괴문서가 나돈다고도 하고, 무슨 무슨 리스트가 있다고도 한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큰 공 (功) 은 접어두고 작은 과 (過)에만 집착하는 국민과 언론이 섭섭하기도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기에 큰 위기에 대범했던 국민이 작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김대중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을 외쳤던 70년대와는 오늘날이 정확히 한 세대 차이가 난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도 배만 채워주면 감지덕지했던 곤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일방적으로 '나를 믿고 따르라' 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충분히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부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고 해서 한 세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런 지도자가 각광을 받으리라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지도자가 국가의 위기를 설명하고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호소했을 때 국민은 기꺼이 동참했다.

그러나 국민이 아무리 화를 내고 불만을 털어놓아도 "당신들은 정치 9단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며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는 한, 비록 그 동기가 역사적인 대통령으로 남기 위한 사심없는 충정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국민 자존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론에 춤추었던 전 정권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여론에 맞서 소신대로 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엉뚱한 교훈을 얻은 꼴이 된다.

金대통령의 대북 (對北) 포용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여론을 무시하고 밀어붙였기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다수가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 정권의 실패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개혁은 깜짝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개혁이야말로 끊임없이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구조적인 비리와 구태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기를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이번 만큼은 과거와 다를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통점은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투명한 정치가 이뤄지지 못할 때 음모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돼 있다.

국민이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 친절한 설명을 위해 국민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아마 이런 소리가 들리리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는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님' 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허물도 있는 인간적인 지도자입니다. " 게다가 우리 국민은 의술은 몰라도 적어도 정치에 대해서는 다들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조기숙 이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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