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영웅의 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영웅의 딸 (청동거울 펴냄) - 머린 머독 著

모든 남자는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떠한가.

그 대답은 모든 여자는 '영웅의 딸' 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처럼 그 자신 영웅이 되지는 못하고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를 내면화한 순종적인 여성들로 스스로를 구성해야 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로 진행돼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금세기 다양한 여성운동들은 바로 이러한 왜곡된 사회구조와 잘못된 신념을 문제삼고 이를 전복하는데 진력해왔다.

여기서 새삼 페미니즘이론과 운동이 이룩한 여러 성과를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페미니즘 운동이 상당히 진척된 서구의 많은 사회에서도 여성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이 어떤 '소진과 고갈' 의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머린 머독의 '영웅의 딸' 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버지 - 어머니 - 자식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 프로이트의 '가족 로맨스' 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융의 분석심리학과 조셉 캠벨의 신화 분석에 관한 설명을 곁들여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많은 여성들은 예전처럼 남성 의존적이지 않으며 가정에만 묶여 있지도 않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성공의 이면엔 아버지와 자신의 동일시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아버지를 영웅시하고 그와 똑같아지기를 열망하는 여성은 성장하여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편안히 다가서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굳게 결합돼 있다는 환상은 자연히 심리적으로 어머니를 거부하게 만들며 이는 어쩔 수 없이 죄의식을 동반하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 결과 그 여성은 성장해서도 '아버지의 시선' 에 목말라하는 어린아이로 남게 된다.

이상화된 아버지에 대한 집착은 딸의 남성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그녀는 현실성 없는 남성상과 남자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근친상간은 궁극적으로 딸 자신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리상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인격적 독립을 위해서 딸은 아버지를 영웅으로서의 원형으로부터 분리해내야 하며 아버지의 어두운 면과 한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서야 그녀는 아버지의 투사대로 인생을 살지 않고 그녀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된다.

프로이트.융.캠벨 등 여러 이론을 통속화해서 여성의 심리에 적용하고 있는 이 책은 별다른 깊이나 통찰은 없지만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과 그것에 대한 반응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인답게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사태는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여성들은 '영웅의 딸' 의 극복은 커녕 '영웅의 딸' 이 되기까지에도 먼 길을 가야할 것으로 보인다.

남진우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