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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세상보기] 제목이 살벌한 책 두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요즘은 책 읽기도 겁난다.

제목이 모두 살벌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한국에 사는 한 일본인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이란 책을 썼다.

저자는 한국인의 무례와 무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책 제목에 나타난 각오대로 맞아 죽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날 법도 한데 말이다.

- "오냐 너 말 한번 잘 했다. 어디 한번 맞고 죽어봐라. 징용가서 죽은 원한, 일본 순사한데 맞아 죽은 원한, 독립만세 부르다 총맞아 죽은 원한, 이 기회에 다 갚아주마. " )

최근에 또 살벌한 제목의 책이 한권 나왔다.

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다.

저자는 중국 문학을 전공한 젊은 교수. 그런데 공자 같은 성인이 죽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니, 이게 정신이 있는 소린가, 없는 소린가.

그렇다고 저자가 열혈 유생 (儒生) 이나 선비로부터 해코지를 당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것은 공자 자신도 죽음에 대해 너그러웠기 때문일 것이

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니 도를 깨치려는 후학이 자신에게 좀 험한 말을 했다고 해서 펄펄 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두 저자가 마냥 안전하기만 할까. 절대 아니다.

분명 충고하건대 저자들은 다음 두분 옆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우선 맞아 죽을 각오를 했다는 일본인은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전직 대통령의 곁에 가면 안된다.

극일 (克日) 외교로 유명한 이 분은 일본을 여러번 곤혹에 빠뜨렸다.

이 대통령은 저자를 만나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나이스 투 미트 유 (Nice to meet you!)" 할 것이다.

그러면 이 분의 속내를 꿰뚫어 아는 통역은 "너 잘 만났다!" 할 것이다.

이 분은 헤어질 때도 역시 웃으며 "시 유 어겐 (See you again!)" 할 것이다. 그러면 통역은 "어디 두고 보자!" 할 것이다.

다음, 공자가 죽기를 바라는 젊은 교수는 가령 한상진 (韓相震) 정신문화연구원장 같은 분의 옆에는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韓교수는 현재의 위험사회.위험문명을 극복하려면 유교의 민본주의 (民本主義) 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시 韓교수가 "바로 너 같은 존재가 공자님의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사문난적 (斯文亂賊) 이야!" 하면 어쩔텐가.

귀띔은 이쯤으로 그치고, '공자가 죽어야…' 를 쓴 저자는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

그러면 스승이 될 수 있다' 는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 을 '뒤돌아보기' , 즉 퇴보적 사상의 대표적 상징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면 이 말은 옛것을 익히면 새것을 알 수 있다는 학문연구의 천착 (穿鑿) 을 권면한 말일 것이다.

학문의 소재를 옛것으로 제한하는 말은 아니다.

이 대목, 즉 '논어' 위정 (爲政) 편 11장의 해설에 보면 그래야만 배움의 응용에 끝이 없게 되는 것이지 단지 암기나 하고 묻기나 하는 이른바 기문지학 (記問之學) 으로는 스승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말을 매도하는 것은 새 지식을 얻으려면 고전 (古典) 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공자왈 맹자왈은 조선 (朝鮮) 의 망국과 함께 죽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족벌주의, 허례허식, 비타협적 명분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은지 오래다.

서양의 합리주의 정신이 유교의 퇴보적 요소를 몰아냈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빈사 (瀕死) 의 유교를 확인사살하기까지 했다 (책 제목이 살벌하니까 글도 험악해지는구나!) .그러니까 오늘의 부조리는 공맹 (孔孟) 의 교리를 충실히 따른 데서 온 것이 아니다.

공자는 이기와 무례를 가르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공자가 되살아나야 한다.

피로가 쌓인 물질문명으로부터 인간회복의 새로운 활력소를 거기서 찾아도 된다.

유교의 소진되지 않은 잠재력 - 거기엔 맑은 샘물이 있을 것이다.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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