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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깊이읽기] 계단에서 읽는 인간의 심리, 시대의 문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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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이화여대 캠퍼스 밸리의 야외 계단에 앉은 임석재 교수. 그는 “계단은 작가가 되고 싶은 건축가라면 반드시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며 “한국에도 계단을 잘 쓰는 건축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훈 인턴기자]

“계단을 읽으면 문명이 보인다.”

최근 『계단, 문명을 오르다』를 출간한 이화여대 임석재 교수(48·건축학과)의 말이다.

“계단에는 개인의 심리작용에서부터 각 시대의 문명 현상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하는 그는 “계단이 인간사 그 자체”라고 했다. 책 1권은 ‘고대~르네상스’, 2권은 ‘바로그~20세기’의 계단 이야기다. 계단을 통해 본 서양문명사다. 흔하고, 한편으론 귀찮은 것이 계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보니 색다른 ‘계단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대의 피라미드 사진부터 화가들이 바벨탑과 ‘야곱의 사다리’를 소재로 그린 그림, 르 코르뷔지에 건축에 나타난 계단, 현대의 렌초 피아노·안도 타다오의 계단이 ‘계단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18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임 교수를 만났다.

-왜 ‘계단’인가.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계단에 관심이 많았다. 골목길 계단의 매력에 빠져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적도 많았다. 『서양건축사』5권을 마치고 나서 건축사를 문명사적인 차원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어떤 내용인가.

“계단은 인간의 정신적·집단적·육체적 문명작용이 집약적으로 저축된 보물창고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고대에 하늘을 향해 긴 거리를 수직으로 거침없이 뻗어올라간 계단은 그 자체가 종교적 아이콘이었고,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좀더 실용적인 계단이 많이 나타나는 등 각 시대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담겨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시기가 있나.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에 담긴 뜻이 교회건축에 끼친 흔적도 흥미롭고,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의 계단 건축도 눈여겨 볼만하다. 미켈란젤로가 천재임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흥미로운 시기는 바로크 시대다.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 인간의 내적 열망이 극대화돼 표출된 시기였는데, 그런 특징이 계단에도 극적으로 드러나있다. 축제용 계단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나.

“일부러 계단만을 주제로 자료를 모아온 것은 아니다. 건축사 연구를 하며 자료를 축적했는데, 머릿속에 만들어진 많은 방들 중에 저장돼 있었다. 기초자료 10%에서 시작, 나머지 90%는 집필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결론적으론 ‘계단의 쇠퇴’를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읽힌다.

“물론이다. 엘리베이터를 얻은 대신에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몸은 수고스럽지만 계단은 주변 환경을 둘러보게 해준다. 계단에서는 경치를 볼 수 있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보다 ‘열려있는’ 계단은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해 소통과 교류의 장이 되고, 재미있는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계단이 비상시 ‘피난시설’이나 ‘기피시설’로만 여겨지고 있는 게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도 계단을 재미있게 만드는 건축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이번 책은 그의 37번째 책이다. 1995년 『추상과 감흥-빈 아르누보 건축』을 출간한 이래 15년 동안 『건축 우리의 자화상』 『우리의 옛 건축과 서양건축의 만남』 『교양으로 읽는 건축』 등을 꾸준히 내왔다. 벌써 ‘한옥’을 주제로 한 38번째 책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생태건축을 주제로 또 한 권을 쓰고 있다고 했다.

다작의 이유를 물으니 “마음을 치유하고, 사회적 책임감과 직업적 욕심 때문에 쓴다”고 답한 그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글쓰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은주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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