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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4. 아름다운 성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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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강연장에서 신세대 학생들을 만나면 자주 물어오는 게 있다.

내 경쟁 상대가 누구냐는 거다.

경쟁이라니, 난 시험에서 20등 이상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입시에 떨어져 재수까지 하고도 겨우 야간 상고에 들어갔는데, 경쟁 소리만 들으면 지금도 엄청 떨리는데…….

"내 경쟁 상대요? 박찬호.박세리. " 그 순간 와우 웃음소리 박수소리. "아니 또 있어요. 빌 게이츠, H.O.T., 디카프리오. " 그러자 휘파람 소리에 힙합 몸짓까지 나오며 야단이었다.

박찬호.박세리는 이미 '국민영웅' 이다.

그들의 볼 하나 퍼팅 하나에 우리의 운명이 걸린 듯 손에 땀을 쥐고 텔레비전 앞에 모여든다.

이제 박찬호.박세리는 신세대들에게 삶의 목표이자 롤모델 (role model 본보기) 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공한 사람을 좋아하고 푹 빠지게 돼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기 힘으로 성공해 나라를 빛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라고 뺨을 붉히며 외치던 소녀처럼 나도 박찬호.박세리를 정말 좋아한다.

마이너리그에서 암울한 시간을 뚫고 일어선 박찬호의 당당한 투구, 박세리의 탄탄한 다리와 흰 맨발의 투혼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박찬호가 몸쪽 직구에 정통한 투수로서 점점 유연한 컨트롤로 빛을 발하듯 그래, 나도 시대 과제와 고난을 정면 돌파하면서 안으로 잘 익어가리라.

박세리가 오직 골프만을 위해 골퍼의 몸을 만들어 가듯, 나 역시 진리 탐구를 위해 고도의 긴장과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을 만들며 짐승처럼 달리기하고 공부하고 써나가리라 다짐하곤 했다.

나는 그들의 프로기질을 사랑한다.

프로농구 용병들이 섬세한 슛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포도주 한 잔도 거절하며 생수만 마시고, 댄스 가수들이 착지 동작에서 4분의 1박자만 틀려도 머리를 감싸고 자책하는 그 치열함을 좋아한다.

지옥훈련을 이겨내는 박찬호.박세리의 고독하고 처절한 열정에 나는 공감한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영웅이다.

지치고 좌절한 우리를 위안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희망의 얼굴인 것이다.

민감한 지성으로 거침없이 솔직한 신세대들이 어찌 이들을 자기 인생의 목표이자 성공의 모델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심각하다.

매스컴마다 박찬호.박세리를 높이 띄우고 찬탄할수록 뭔가 불안하다.

그들의 감동의 투혼, 그것은 무엇을 위한 투혼인가? 그들을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온갖 고생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젊음을 빛내는 잘 생기고 예의바른 우리의 박찬호.박세리.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는 스타시스템은 결국 '돈' 과 '인기' 가 아닌가.

그들의 눈물겨운 땀과 도전은 오로지 정상을 향하여,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향하여,끝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연료가 아닌가.

그들처럼 일단 '뜨고' 나면 눈부신 자선 행위로 사랑과 인격까지 얻을 수 있다고 우리 모두를 환상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무한경쟁의 세계 무대에서 정직한 노력으로 얻어낸 승리와 영예는 정말 값진 것이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연줄과 특혜로 이룬 우물안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갖은 불리함과 차별을 딛고 세계에서 통하는 실력 하나로 이룬 '깨끗한 성공'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찬호.박세리들이 훌륭한 스포츠선수.연예인.컴퓨터기술자를 넘어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의 정신 권력으로 다가오는 건 심각한 문제다.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 이 눈 맑은 신세대의 가치관을 온통 지배해서도 안될 일이다.

일등은 오직 하나뿐, 최선을 다하고서도 우승하지 못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계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오직 그 분야에서 잠깐 영웅일 뿐, 스포츠나 연예나 컴퓨터 분야의 승자가 곧바로 인생의 승자는 아니다.

돈과 권력과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그만큼 행복해지고 영혼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오직 박찬호.박세리.빌 게이츠.H.O.T.를 닮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광기 어린 성공 제일주의, 그 유일 사상은 무너져야 한다.

삶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들을 눈멀게 하는 화려한 불빛이라면 그것은 꺼져야 한다.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으며 스타들을 자신의 성공 모델로 추구하는 것은 결코 그들 탓이 아니다.

박찬호.박세리 탓도 아니다.

"사람은 그가 응시하는 것이 된다" 는 말이 있다.

신세대들이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고 싶고 닮고 싶은 참사람, 자기를 비춰 볼 매력 있는 거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과 나눔과 진리 추구의 삶이 박찬호.박세리의 무용담만큼 멋지고 아름답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감동의 사람을 내놓을 수 없고, 그런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우리의 나태와 무능이 문제인 것이다.

미래의 주인공인 신세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공' 의 본보기가 있어야 그들의 가치 중심이 잡힐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시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개인의 출세보다 민중과 다같이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자며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이라고 내걸었던 깃발, 그것을 다시 꺼내 드는 것은 때 맞지 않은 일이다.

빈곤의 평등과 무능의 평등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는 "한 사람의 열 걸음을 열 사람의 백 걸음으로" 만들어 가는 개인의 창조력과 나눔의 확산이 참된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 분야에서 자기 실력으로 '뜨는' 개인이 되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떴다' 라는 말은 출세했다는 말이다.

나갈 출 (出) 세상 세 (世) , 곧 세상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민심 속으로 들어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출세한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떴다는 것은 삶에서 뿌리가 들떴다는 것, 다시 말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동떨어져 군림하는 위치에 선다는 말일 수도 있다.

'뜬다' 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죄가 되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앙상하게 시들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짜 산을 아는 사람은 등산한다고 하지 않고 입산한다고 한다.

더 높은 곳으로 경쟁하며 오르는 등산 (登山) 이 아니라 산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입산 (入山) 이라는 것이다.

산 속으로 들어가려면 지극히 작고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발뒤꿈치로 자기 뿌리를 꾹꾹 딛고 걸어가야만 푸른 산 기운을 받아 오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뿌리가 들뜨지 않으려면 성공을 위한 노력 못지 않게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를 늘 성찰해야 한다.

성공한 그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나의 성공이 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에게 무엇인지를 묻고 또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쟁 상대가 누구인가.

깊이 살펴보면 사실 경쟁 상대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은 누구와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행복해지는 데 있다.

사랑과 나눔에 무슨 경쟁이 있겠는가.

서로 다름을 긍정하고 서로 나누고 연대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승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굳이 경쟁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진짜 경쟁 상대는 나 자신" 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치열한 것인데 자꾸 착하고 옳음에만 안주하려는 나. 세상도 사람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저 원칙만 쥐고 변화를 거부하려는 나.어제 이룬 것을 누리려 하고 다시 새벽에 길 떠나기를 주저하는 나. 사랑이 사무치면 그것을 이룰 실력을 더 키워야 하는데도 자기 한계에 머무는 나.

나의 경쟁 상대는 그런 나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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