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유상철 특파원 베이징 반미시위 현장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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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일 정오.

5월의 햇살이 따가운 베이징 (北京) 시 차오양 (朝陽) 구의 르탄 (日壇) 공원 정문 앞. 평소 라오바이싱 (老百姓) 들이 한담을 나누거나 산책을 하는 한가로운 곳이다.

그러나 이날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대형 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하기가 무섭게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내 함성이 터진다.

'우리 인민의 핏값을 지불하라' '타도 미국' '나토 해산' .피로 쓴 듯 붉디 붉은 플래카드로 무장한 학생들의 얼굴도 흥분으로 벌겋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격한 구호를 토하면서도 이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정돈, 3백m가량 떨어진 미 대사관으로 나아간다.

젊은 대학생들의 반미구호가 베이징을 진동시킬 때마다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시민들로부터는 격려의 박수가 아낌없이 쏟아진다.

중국의 무장경찰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얼굴에는 학생들 시위가 대견하다는 표정이다.

한 여성 사복경찰은 "시위를 안막겠다" 고 말한다.

중국 관민 (官民) 들이 함께 뿜어내는 반미시위의 현장인 것이다.

10일로 벌써 3일째다.

8일 오후부터 미 대사관이 위치한 슈수이 (秀水)가로 몰려들기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0일부터는 무장경찰이 나서 학생들이 한꺼번에 미 대사관 앞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행여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막기 위한 조치다.

소속 학교별로 조직돼 미 대사관으로 행진하는 학생들의 상당수가 무장경찰의 제지로 내려놓는 돌덩이들이 주먹만하다.

"우리 대사관이 폭격받았는데 저들 미국대사관이 온전하다면 말이 되는가.

" 격한 학생들이 내뱉는 말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다시 한번 '타도 미제' 를 부르짖는다.

성난 표정의 한 학생에게 물었다.

- 어느 대학인가.

"톈진 (天津) 경공업 학원이다. 오늘 아침 톈진에서 올라왔다. " 톈진에서 베이징까지는 버스로 한시간 거리다. "

- 월요일인데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분해서다. 터지는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어제 9일은 중국의 어머니날이었다. 중국은 이날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을 맛봤다.

이같은 야만행위를 일삼는 미국이 감히 세계의 인권을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

- 왜 이런 비극이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중국의 힘이 아직 약하기 때문이다. 힘이 약하니 오만한 미국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미사일 3발이 어떻게 실수에 의한 오발인가. 미국은 철면피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기는 방법은 힘을 키우는 일이다. 우리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미국에 더이상의 업신여김을 당해서는 안된다. "

결국은 울분이다.

비분강개 (悲憤慷慨) 인 것이다.

시위현장에선 미국의 국력에 눌려 서방의 잣대에 맞춰야했던 설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있다.

또다시 미국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다.

인민해방군은 9일 '전쟁불사론' 이 나오는 가운데 군 현대화와 국방력 강화를 맹세했다.

자동차 생산으로 유명한 이치 (一氣) 그룹은 '더욱 많이, 더욱 좋은 자동차를 생산해 국부 (國富) 를 키우자' 고 다짐했다.

닝보 (寧波) 의 전하이 (鎭海) 화학공사는 '이럴 때 일수록 생산활동에 박차를 가하자' 고 외쳤다.

시위에서 보이는 '민관협조' 를 가지고 섣불리 관제 (官製) 라고 단정하기에는 중국인들의 표정은 너무 진지하다.

베이징 = 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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