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투자 못살리면 내년경기 시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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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 어느 국책연구소장은 올해 경제성장이 4%를 넘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수정전망치가 나오자 이를 들고 몇몇 '고수 (高手)' 들을 찾았다.

자료를 발표하기 전에 고수들의 감 (感) 과 맞아떨어지는지 검증도 해보고 훈수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왕년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주역이었던 한 고수로부터 연구소장은 면박에 가까운 충고를 들어야만 했다.

" (연구소만이 아니라) 왜 다들 올해 성장률을 놓고 촐싹대는가. 문제는 내년 성장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올해 성장전망이 얼마나 높아지느냐가 아니다. 연구소가 할 일은 내년에야말로 건실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건의하는 것이다. "

올 들어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소비가 살아나고 공장 가동률도 높아지고 있다. 저금리가 받치고 경기회복세가 이끄는 주식시장도 상승장세를 이어간다. 성장전망은 계속 상향조정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내년 성장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다들 현재의 경기회복세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처럼의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 함일까. 그러나 경제부처의 핵심 간부들조차 실제 속마음으로는 내년 경기를 걱정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의 불황 (성장률 - 5.8%)에 대한 기술적 반등만으로도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내년부터다. 지금 잘 대응하지 못하면 내년에 성장률은 다시 떨어질 위험이 크다. 올해는 소비로 먹고 산다지만 내년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잘못하면 W형의 경기순환이 올지 모른다. " (재경부 현오석 경제정책국장)

존 도즈워스 국제통화기금 (IMF) 서울사무소 대표도 최근 서울 주재 외교관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년에 한국 경제가 다시 어려움과 맞닥뜨릴지 모른다" 고 경고했다. 재정적자가 커져 더 이상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어려워지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정부가 재정지출확대.저금리정책 등으로 시동을 건 현재의 '소비 경기' 가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야 내년에도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설비투자의 활력 회복이 핵심인데 아직은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기논쟁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 (서강대 김병주 교수)

"핵심은 구조조정이다. 성장세가 투자로 연결되기 위해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하고 중소기업은 간접금융을 통한 신규투자를 일으켜야 한다. 특히 재벌들이 지금의 덩치를 그대로 두고서는 경기회복이 투자로 이어질 수 없다. 부실을 떼어내야 신규투자가 가능하다. " (현오석 국장)

구조조정을 거쳐 신규투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현재의 경기회복에 '뒷심' 이 없어 반짝경기에 그치고, 이 경우 소비경기는 또다시 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그 방법을 두고 재계는 처방을 달리한다. "지식기반산업 또는 서비스산업으로 바뀌어야 한다지만 과연 투자와 제조업이 주도하던 한국 경제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바뀔 수 있겠는가. 제조업의 성장기반이 붕괴될 것이다. 개혁과 구조조정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장잠재력의 붕괴를 최소화하고 안정성장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현재의 재벌개혁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재검토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재계의 의견은 이미 집약된 셈이다. 획일적인 부채비율 감축, 설비와 인원을 마음대로 줄이지 못하는 빅딜, 6대 이하 그룹에는 걸림돌이기만 한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 등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역시 지금은 대기업 중심의 투자가 일어나야 내년 성장이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저금리와 소비가 불쏘시개가 된 현재의 경기회복이 투자라는 장작에 제때 제대로 옮겨 붙지 못하면 내년에는 끔찍한 결과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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