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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신종 플루와 경제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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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신종 플루와 경제위기는 어떨까. 언뜻 둘 사이도 별 상관관계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웬걸, 속을 들여다보면 닮은 꼴이다. 단계별로 짚어보면 더 분명해진다. 첫째, 기(起), 시작 단계. 독불장군은 없다. 지구촌 곳곳의 돈과 사람이 수시로 섞이다 보니 바이러스며 경제위기 따위의 불청객만 따로 골라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해법도 전 세계가 같이 찾게 된다. 신종 플루가 퍼지자 전 세계가 일제히 방역망을 가동한 것이나 얼마 전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미국 재무장관이 “글로벌 차원에서 출구전략을 논의하자”고 한 것도 그래서다.

둘째, 승(承), 발전 단계. 음모론이 따라붙는다. 꼭 1년 전 오늘, 금융위기가 터지자 갖가지 음모설이 퍼졌다. 대표적인 게 유대계 자본 음모설이다. 이들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의로 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종 플루를 둘러싼 음모설도 만만찮다. 치료제를 많이 팔기 위해 바이러스의 위험을 부풀렸다는 얘기는 애교 수준이다. 바이러스를 고의로 만들어 퍼뜨렸다는 주장도 나온다. 올 4월 인도네시아의 시티 파딜라 수파리 보건장관은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신종 플루가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셋째, 전(轉), 반전 단계. 금세 잊는다, 그랬다가 다시 호들갑을 떤다. 5월 초 첫 환자가 발생하자 나라 안팎이 시끄러웠다. 돼지 인플루엔자란 이름 때문에 돼지고기 판매량이 급감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조금 잠잠해지자 관심도 멀어졌다. 첫 사망자가 나타난 8월까지 신종 플루는 감기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됐다. 지금 같은 호들갑이 재연될 것이라곤 꿈도 못 꿨다. 1929년 대공황 이래 반복돼 온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거품에 취해 다가올 파산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넷째, 결(結), 마무리 단계. 돈으로 막는다. 늦을수록 들어가는 돈도 늘어난다. 8월 이후 급하게 구하느라 백신 1300만 명 분에 3000억원이 들어갔다. 지난해에 미리 샀다면 훨씬 싸게 샀을 것이다. 사회적 비용도 크다. 공포와 혼란이 지나쳐 경제 활동도 위축되고 있다. 경제가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 지금으로선 예측 불가다. 질병관리본부는 이런 바이러스들에 잘못 대처하면 최악의 경우 27조원의 경제 손실을 입을 것이란 용역보고서를 3년 전 내놓기도 했다.

경제위기 수습 과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재정 50조원을 쏟아 부었다. 일찍, 많이 쏟아 부은 효과를 제법 봤다. 반면 머뭇대던 미국이나 유럽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돈을 넣고도 상황은 우리만큼 호전되지 못했다.

기승전결로 마침표를 찍으면 좋겠지만, 속편이 더 있다. 속편의 제목은 ‘뒷말’이다. 벌써 재정을 푼 효과를 칭찬하는 대신 재정 위기를 강조하는 ‘투덜이’들이 많아졌다. 과거 정권이 고생해 이룬 건전 재정을 이 정권이 홀라당 들어먹었다는 게 단골메뉴다. 올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백신과 치료제가 남게 되면 신종 플루도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누가 그 많은 돈을 들여 쓸데없이 ‘감기약’을 잔뜩 사놨느냐고. 외국 제약사와의 검은 커넥션을 파헤쳐야 한다고. 그런 투덜이들에게 되묻고 싶다. ‘백신 없는 플루’와 ‘플루 없는 백신’ 중 당신은 어느 걸 택하겠느냐고. 경제 위기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