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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0> 新중국 건국 전야① 동북해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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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2일 주더·마오쩌둥·린뱌오(왼쪽부터)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선양에 입성하는 동북야전군.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9일 소·만국경을 넘어 동북에 진입한 소련 홍군은 일본 관동군에 총공세를 퍼부어 15년간 일제 치하에 있던 동북3성을 해방시켰다. 대도시에 장제스와 함께 레닌·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아무리 해방군이라도 소련 홍군은 남의 나라 군대였다. 중국 영토에서 나가라는 시위가 대도시에서 연일 벌어졌다. 소련군의 철수는 시간문제였다.

국·공이 합작해 치른 8년간의 항일전쟁은 양당의 역량을 증강시켰다. 700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공산당도 항일전쟁 이전 3만 명에 불과하던 병력이 100만 명을 넘었다. 관할 구역의 인구도 1억 명을 돌파했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동북에 중공은 선수를 쳤다. 45년 9월부터 간부와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몰수해 동북야전군(東北野戰軍)의 전신인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을 결성했다.

46년 1월 소련 홍군은 국민당 정부의 선양(瀋陽) 접수에 동의했다. 국민당 군은 이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에 최정예 30만 명을 집결시킨 후 민주연군의 선양 철수를 소련군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소련군이 창춘(長春)마저 국민당 측에 내주자 민주연군은 기습으로 창춘을 점령했다. 1개월 후 국민당 군은 쓰핑(四平)·번시(本溪)·창춘의 민주연군에 전면 공세를 가했다. 중공의 동북국 서기 겸 민주연군 총사령관 린뱌오(林彪)는 전군을 도시에서 철수시켰다. 용감과 패기 외에는 내놓을 게 없는 린뱌오의 부하들은 “예전의 린뱌오가 아니다. 8년간 소련에서 병치레하더니 총기가 사라졌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잠시지만 마오쩌둥도 린뱌오를 오해했다.

몇백 년 동안 민간에 떠돌던 “창춘을 먹는 자가 동북을 먹는다” “동북을 취한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쌍방의 통수권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5월 30일 국방부장을 대동하고 창춘을 방문한 장제스는 공산당 군대의 전술이 국공 합작 이전 유격전을 벌이던 시절에 비해 어떤지 궁금했다. 지휘관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신통치 않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게 없습니다.”

“공산당과 린뱌오의 부대가 고작 이 정도라면….” 장제스는 무력으로 중공과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46년 6월 26일 내전이 폭발했다. 조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마셜 원수는 “미국인들이 낸 세금을 엉뚱한 곳에서 탕진하게 생겼다”는 묘한 말을 남기고 중국을 떠났다.

7월 7일 린뱌오는 동북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7·7 결의(七七決議)’를 통과시켰다. 부서기 천윈(陳雲)은 “도시에서 철수해야 한다. 자동차를 버리고 군화도 벗어 던지고 농민복으로 갈아입자. 문무와 남녀를 막론하고, 자격이 있건 없건,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이 공산당원의 품격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성패는 농민들에게 달렸다. 지위가 높을수록 너절한 일에 열중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근거지 옌안에서 철수해 촌구석을 전전하던 마오쩌둥도 미국인 기자에게 “혁명은 폭동이다. 농민들이 승패를 좌우한다. 국민당은 토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도시 몇 개를 얻는 것보다 농민 열 명의 지지가 더 중요하다”고 호언장담했다. 린뱌오에게 “우리 사이에 오해는 없다”는 전문을 발송했다.

농촌 경험이 풍부한 중국공산당은 농민들의 심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다. 토지개혁을 필두로 악질 지주와 일본에 부역한 한간들을 단호히 처단했다. 농민들은 현(縣)위원회 서기의 집무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공산당은 2년 만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장백산 언저리까지 철수했던 민주연군은 47년 4월부터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린뱌오의 대군은 추계 공세를 펼쳐 국민당 군을 선양 등 24개 도시에 몰아넣어 고립시켰다. 이듬해 3월부터 펼친 동계 공세에서는 선양·창춘·진저우(錦州)의 국민당 군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머무르면 죽고 나오면 산다”는 전단을 끊임없이 성 안에 살포했다. 3개의 대도시를 제외한 동북 전역은 순식간에 공산당의 천하로 변했다.

9월 12일 ‘랴오선(遼瀋) 전역(戰役)’이 폭발했다. 2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린뱌오의 대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31시간 만에 진저우 국민당 군 12만 명을 전멸시켰고 장군 43명을 포로로 잡았다. 병력도 230여만 명으로 증가했다. 창춘에 주둔하던 국민당 제60군 군단장과 동북지구 부사령관 겸 제1병단 사령관은 투항했다.

11월 2일 동북야전군의 선양 입성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의 전주곡이었다. 구경나온 시민들은 깜짝 놀랐다. 꽹과리 소리와 마오쩌둥·주더·린뱌오의 초상화만 없었다면 완벽한 미군들이었다. 탱크·차량·대포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제였다. “장제스가 우리의 보급대장”이라는 마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8일 후에는 국민당 최후의 기동부대를 전멸시키고 동북 전역을 장악했다. 린뱌오가 장제스의 오판을 유도한 지 2년6개월 만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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