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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기업 옥죄기' 여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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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건축허가 취소' - . 지난해 말 서울의 S정유 주유소에는 날벼락 공문이 날아들었다.

건축허가를 받고 주유소 옆 자투리땅에 짓는 음식점이 곧 완공될 참이었는데 허가가 소급취소된 것이다.

알고 보니 한달여 앞서 서울 오금동에서 LP가스통 폭발사고가 나자 관계당국이 보신 (保身) 행정을 펴는 과정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조치였다.

주유소 대표는 "행정소송을 내겠다" 며 맞섰고, 담당공무원은 "위에서 시키는 일이다. 나도 정말 죽을 맛" 이라고 통사정했다.

주유소측은 결국 소방법상 문제가 없던 주유기쪽 벽면의 붙박이 유리창 안쪽에 방화벽을 세워야 했다.

음식점 매장면적이 그만큼 줄었음은 물론이다.

경기도 H전자의 K임원은 '수질오염' 이라는 말만 들어도 지겹다.

수시로 찾아드는 단속원들 때문. 감독기관은 환경부.국무총리실 산하 수질기획단.경기도.환경관리청 등 무려 16개나 된다.

하지만 정작 챙기는 내용은 배출량 신고 등 형식적인 게 대부분이다.

게다가 측정결과도 기관마다 달라 신뢰도에 의심이 간다고 K씨는 말한다.

실속없는 규제에 기업이 휘둘리고 갑갑해지는 사례다.

경제위기 이후 국가 생존전략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돼온 기업규제개혁. 절차의 편의성은 많이 개선됐지만 기업을 옥죄는 주범인 관료주의와 규제만능주의는 여전하다.

정부는 경쟁력 강화와 외자유치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거의 풀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외국인투자 자유화, 금융기관 진입 및 영업활동 규제완화, 수출입 통관절차 간소화 등의 조치는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문서상으로 규제를 푼다 해도 공무원의 무성의와 보신주의가 변함없고 허점투성이 법령이 그대로면 기업은 골탕 먹게 마련이다.

여기에 ▶효율성 제고를 가로막는 핵심규제 ▶과다한 재량권 행사 ▶자의적 규제 ▶무소불위의 창구지도 ▶중복규제 등이 고스란히 남아 "기업하기에 좋은 나라가 되기엔 아직 멀었다" 는 게 현장의 소리다.

한국외국인기업협회가 최근 19개 외국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의 투자환경에 대한 설문조사' 에서도 응답자 대부분이 "한국은 아직 멀었다" 고 답했다.

치료기와 수술기, 주 스위치와 메인 S/W (스위치의 약자) .비슷하거나 같은 말이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이를 칼 같이 구분해 규제의 무기로 삼는다.

의료기기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백경호 (白慶浩.서울 삼성동.45) 씨. 지난해 11월 17일 첨단기기를 수입하려고 '기준 및 시험방법 검토 의뢰서' 를 제출했다가 다섯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돌려받은 신청서마다 문구수정 지시만 가득했다.

그것도 치료기→수술기 (98년 11월 17일) , 멈춤→비상정지 (11월 21일) , 지시치→설정치 (99년 1월 21일) , 열쇠→키 (1월 25일) , 주 스위치→메인 S/W (1월 25일) 등 뭐가 다른지 도대체 알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식약청 기록만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수정지시는 단 한차례만 할 수 있다' 는 내부 규정을 지킨 것처럼 보이기 위해 12월30일 한차례만 수정한 것으로 돼 있으며 통과일자도 99년 2월18일이 아니라 1월27일로 조작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돈을 건네 해결하던 옛날이 훨씬 편했습니다. " 白씨의 냉소적인 말이다.

외환위기 이후 새로 등장한 규제도 많다.

외화 불법유출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송금 때마다 관할 세무서장의 '납부세액 확인서' 를 받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송금 횟수가 매년 2천건이나 돼 담당자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다.

영어를 잘 모르는 관할 세무서 직원을 위해 모든 계약서를 한글로 번역해야 하는 등 확인서에 소요되는 시간이 보통 열흘을 넘는다.

이 문제를 재정경제부.총리실 등에 문의했으나 "관할 업무가 아니다" 며 모두 발뺌하더라는 것. 기업규제 개혁의 현황을 가늠케 한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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