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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밋줄긋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1호 02면

중학생인 큰 딸아이 방에 들어갔다가 침대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고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이었습니다. 문득 ‘아사코’가 생각나 한번 펼쳐 봤죠. 그런데 눈에 띈 것은 아이가 밑줄 쳐 놓은 대목이었습니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고 없앤 시간, 바둑 두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 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하느라 보냈다. 아마 내가 책과 같이 지낸 시간보다도 서영이와 같이 지낸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가 산 참된 시간이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은 물론, 내 생애에 가장 행복된 부분이다.”(126쪽)

서영이는 선생님의 따님이죠(지금은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인데 아들이 ‘디토’의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프입니다). 이 글에는 딸에 대한 애정이 뭉클할 정도로 배어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아빠도 있구나, 우리 애는 생각했겠죠.

회사에서 신간을 정리하다가 전혜성 박사의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박사는 그 자신이 훌륭한 학자이면서 여섯 자녀 모두를 미국 사회의 리더로 키워낸 ‘좋은 엄마’입니다. 학생으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들이 의지하는 맏언니이자 큰누나로서 1초를 아껴 가며 살아낸 삶을 읽으며 세상엔 이런 엄마도 있구나, 했습니다. 그의 아이들도 그랬던가 봅니다.

“셋째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네 살 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었다. 그날은 어머니날이었다. 두 아이는 노래를 부르며 들어와 내 뺨에 뽀뽀를 하더니,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오렌지 주스와 삶은 계란, 토스트, 우유, 그리고 냅킨이 포크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셋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몹시 힘들고 지쳐 있었는데, 고작 18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 어린 것들이 피곤한 엄마를 위해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다.”(58쪽)

전 이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네 살짜리의 마음을 움직인 부모의 자세를 생각하면서요. 이제부터 더 잘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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