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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8.서울대 미학과 출신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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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시인이자 사상가 김지하, 문화 기획자 강준혁,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시인 황지우, 영화기획자 신철, 신예 문화 독설가 진중권…. 모두 한국 문화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뭘까. 바로 서울대 미학과를 나왔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데 모여 그룹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활동을 통해 미학을 실현하려 노력했던 인물들. 다시 말해 미학 최고의 주제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풀어낸 '미학실천파' 라 할 수 있다. 미학실천파의 역사는 미학과가 미술대에 소속됐던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계의 고 이낙훈, 고 김동훈씨 등이 원조격. 이후 60년 문리대로 소속을 옮기면서 이들 실천그룹이 속속 등장한다.

미학실천파의 분위기는 김지하 (金芝河.본명 英一.58.명지대.문학창작과) 라는 걸출한 인물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오적' 등의 시를 통해 유신정권과 정면대결을 펼쳤고 최근 단군으로부터 비롯된 우주적 삶을 회복하려는 '율려사상' 을 설파하는 그이지만 미학과 시절 그의 주요 활동공간은 연극 무대였다.

그는 당시 동기생이던 정일성 (鄭一成.59.극단 미학 대표) 씨와 함께 문리대 연극회를 이끌며 문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연출이나 기획에도 재능을 발휘했지만 연극회 후배에 대한 카리스마적 장악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하 형은 66년 졸업 후에도 학교 정문 앞에 와선 후배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죠. 수업을 받다가도 빠져나와 형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 연극 연출가 이상우 (李相宇.48) 씨의 추억이다.

당시 연극회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미학과였을 정도로 이들과 연극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다.

정한룡 (鄭漢龍.53.연우무대 대표) 씨는 물리학과로 입학했지만 연극활동을 위해 미학과로 적을 옮겼을 정도다.

"연극회에 미학과 학생이 많고, 또 같은 말을 해도 미학과생이 하면 '말발' 이 먹히더라구요. " 鄭씨의 말이다.

정일성씨는 문리대 연극회를 주도한 뒤 60년대 동양방송 (TBC) PD를 지냈다.

88년 20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극단 '미학' 을 설립해 왕성한 연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한룡.이상우씨는 문리대 연극회 출신의 김광림씨 등과 함께 78년 연우무대를 만들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칠수와 만수' 같은 실험성과 풍자성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내며 80, 90년대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

각종 공연이나 행사의 기획자도 여럿 배출됐다.

서울대 총연극회장을 지낸 구자흥 (具滋興.54.SCA 문화디자인 대표) 씨는 민중극장 등을 거치며 공연 기획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 연극제' '춘천 인형극제' 등을 기획,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준혁 (姜駿赫.52.스튜디오 메타 대표) 씨는 30세의 나이로 공간사랑의 극장장을 지내며 각종 공연을 기획했다.

그는 지난해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세계적인 명성도 얻었다.

이렇듯 미학실천파는 주어진 틀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 열려지지 않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탈춤.마당극 등을 대중적인 문화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채희완 (蔡熙完.51.부산대.무용학) 교수 역시 대표적 인물. 그는 미학과 입학 직후부터 가면극 연구회에서 교습받은 탈춤을 전국 대학에 보급시켰다.

그가 주도한 탈춤반은 대학의 민족.민중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신철 (申哲.41.신씨네 대표) 씨도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 대학 2학년때 충무로에 진출한 그는 88년 최초의 영화기획사 '신씨네' 를 창립했다.

그가 제작한 '구미호' '은행나무 침대' 등은 한국 영화계에 과학적 마케팅과 잘 짜인 기획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작품들. 미술사 연구에 미학적 관점을 접목시킨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김윤수 (金潤洙.63.영남대.회화) 교수를 비롯, 권영필 (權寧弼.58.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김홍남 (金洪男.51.이화여대 박물관장.미술사) 교수 등은 우리 미술의 역사를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왔다.

이중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로 미술사를 대중화한 유홍준 (兪弘濬.50.영남대 박물관장.미술사) 교수는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는 전통과 현실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미술사의 미학적 조망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이들 미학과 출신의 특징은 예술적 작업을 하더라도 미학의 주제 중 하나인 '예술과 사회의 관계' 라는 문제를 고민해왔다는 점이다.

시인이자 조각.사진 등 전방위 예술을 지향하는 황지우 (黃芝雨.47.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극작) 씨의 경우가 대표적. 그는 80년대 파격적인 시를 통해 권력에 맞섬과 동시에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았다.

김문환 (金文煥.55.서울대.미학) 교수는 순수학문적인 연구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진행시킨 경우. 그는 사회미학적인 관점에 입각, 문화정책이나 문화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전개하며 현재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을 맡고 있다.

또 그는 30년간 연극평론가로 활동해왔다.

이같은 전통은 80년대 세대인 진중권 (陳重權.36.베를린자유대학 유학중) 씨에게로 이어진다.

80년대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정치적 문화운동' 을 전개했던 그는 최근 보수주의자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를 출간해 화

제가 됐다.

그런데 미학과 출신들이 이처럼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빛을 발하게 된 이유는 뭘까. 우선 개개인의 '예술 지향성' 을 들 수 있다.

"고3 때까지 클라리넷을 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김지하 선배가 '진정한 예술을 하려면 미학과에 가야 한다' 고 하더군요. 게다가 무언가 '미학' 이라는 데서 예술적인 '냄새' 가 난다는 생각이 들어 이 학과를 지망하게 됐죠. " 강준혁씨의 이야기다.

그 뿐 아니라 고교 시절에 미술 (이상우.신철).음악 (김문환).문학 (구자흥.황지우) 등을 추구했던 이들도 비슷한 경우. 미학이란 학문 그 자체도 영향을 미쳤다.

'감성에 대한 인식론' 인 미학의 핵심 주제들이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의 뇌리에 박혔을 것은 당연한 일. 여기에 선후배.동료간의 끈끈한 애정과 상호교류로 형성된 공동체적 힘이 덧붙여지면서 지금의 미학실천파가 형성된 것이다.

"미학이란 분야는 아주 근본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원칙을 강조하게 된다. 미학과 출신들이 미개척 분야를 과감하게 돌파해나갔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느냐" 고 유홍준 교수는 말한다.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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