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 많이 당해야 영어회화 실력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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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남씨가 서울 마포구청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강단에만 서면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힘이 넘친다. 공무원과 군인들에게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쳐주고 있는 서기남(64·사진)씨 이야기다. 영어가 좋아서, 미국에서 살며 실생활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을 인생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의 본업은 무역업이다. 영어 가르치기는 지난해 3월 인천공항에서 젊은 경찰관의 영어 공포증을 목격한 뒤 시작했다.

“외국인이 말을 걸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화장실로 냅다 도망을 가더라고요. 대신 답을 해준 뒤 화장실로 들어가 얘기를 나눠보니 영어를 10년 넘게 공부하긴 했는데 입이 도저히 안 떨어진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공항 측에 연락을 해서 무료 영어회화 강좌를 개설했다. 꽤 호응을 얻어 입소문도 났다. 그 뒤 육군 60사단과 마포구청에서도 강좌를 열게 됐다. 모든 강좌는 무료다. 매주 4시간 이상 꼬박꼬박 강의하러 다니고 있다. 마포구청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강의를 듣는 김은모(35·공무원)씨는 “외국인들이 구청에 찾아올 때가 늘어났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쌓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씨는 “젊은 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강단에 선다”고 강조했다. “꼭 영어가 아니더라도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세대에게 나누어줄 자산은 풍부해요. 고령화 사회라 문제라고 말만 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합니다. 노인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지식으로, 특기가 있는 사람은 특기로 사회에 공헌할 일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하러 갈 때면 말쑥한 차림은 기본. 말끔히 다린 양복을 입고 포켓스퀘어(주머니에 손수건 등을 꽂아 포인트를 주는 것)로 멋도 낸다. 하지만, 영어를 할 때만큼은 체면치레할 생각을 지우고 배짱 있게 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영어는 배짱입니다. 주어·보어·전치사 등등 문법 생각 말고 자신감 있게 말을 해야 해요. 우리가 정상회담 통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무역협정 협상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가 외국 가는 비행기를 처음 탄 건 1976년. 한국해외개발공사에 통역사로 선발돼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갔다. 원래 영어가 좋았고 외국, 특히 미국에서 살겠노라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란에서 귀국을 하는 대신 관광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테헤란서 사귀었던 미국인 친구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 신세를 지다 미국 영주권을 가진 한국인 여성과 부부의 연을 맺어 미국에서 살게 됐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건 지금도 그의 지론이다.

그는 “회화를 잘하려면 창피를 많이 당해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많이 부딪칠수록 두려움이라는 벽은 깨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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