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전쟁의 명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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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쟁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 전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일 수 없는 극단적인 길이다.

더 좋은 선택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이다.

그런데 전쟁은 정치지도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길이 되기도 한다.

국민의 이목을 사로잡아 다른 문제들을 감추기에도 편리하고 전쟁의 극한상황 속에서 행정력 (executive power) 을 극대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 편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지난해 말 하원의 탄핵표결을 목전에 두고 이라크 공습을 감행한 클린턴 대통령이 국내외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이 좋은 예다.

역사는 전쟁의 명분으로 곧잘 이용된다.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이 90년대 내내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집권 연장의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그러나 그는 세르비아가 터키에 제압당한 6백여년 전의 코소보 전투를 내세워 민족주의를 격동시킨다.

터키가 코소보에 이주시킨 알바니아계 주민을 5백년 터키 지배와 연결된 원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민족의 요람 코소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계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다.

유고 공격의 주역인 미국측도 역사를 갖다댄다.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발칸지역이 1, 2차 세계대전에서 얼마나 예민한 역할을 맡았는지 상기시키며 "그곳에는 지금도 큰 전쟁을 촉발할 조건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수긍하지 않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발칸이 '유럽의 화약고' 가 된 것은 외부세력의 개입 때문이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어떻게 지지고 볶든 저희들끼리 해결할 문제를 놓고 분쟁 당사자들이 극단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어 온 것이 외세의 개입이라는 것이다.

밀로셰비치의 호전성을 규탄하며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의 개입을 지지해 온 미국 언론도 클린턴의 설익은 역사관에는 체머리를 흔든다.

대외적 야욕은 없이 정권 유지에 급급한 밀로셰비치를 놓고 세계대전을 들먹인다는 것이 당키나 한 일이냐, 지상군의 전투까지 포함하는 확전의 속셈을 가진 건 아니냐는 야유와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경찰노릇이란 것이 원래 쉬운 것이 아니다.

질서의 수호자인 경찰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강압적 수단의 소유자로서 경찰은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탄핵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도덕성에 흠집이 난 클린턴이 세계경찰 총수 노릇을 하기엔 벅찬 점이 많은 것 같아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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