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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이 누비던 땅, 이젠 한국 기업 광고판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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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오전 7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백범 김구 선생 앞에 한 청년이 섰다. 윤봉길(당시 24세)이었다. 사지로 떠나는 청년 윤봉길은 말한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꿔 찹시다. 제 것이 선생님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저는 이제부터 좋은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장정(長征), 나의 광복군 시절’-김준엽). 그날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한꺼번에 폭사시켜 일제 침략에 시달리던 아시아 각국을 놀라게 했다.

상하이 뤼쉰(魯迅·옛 훙커우) 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梅亭)’에는 당시 윤 의사가 건넸던 시계 등 그의 겨레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전시물들이 진열돼 있다.
이렇듯 상하이는 일제(日帝)시기 독립투쟁의 본산이었다. 시내 중심가 마당루(馬當路)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는 80여 년 전 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애국 선열들의 생활상이 생생히 느껴진다.

더 멀리 올라가면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그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21세의 김대건은 한국으로 건너와 포교생활을 하다 4년 만에 순교했다. 푸둥에 있는 진자샹 성당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과거의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거점, 서구 문물 도입의 창구였다면 오늘날의 상하이는 비즈니스의 땅이다. 많은 한국 기업이 상하이와 주변 도시에 진출해 대륙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고급 쇼핑센터인 ‘강화이(港淮) 백화점’에 입주한 한국 캐주얼스포츠 브랜드인 EXR 매장. 이곳에서 팔리는 청바지 가격은 한 벌에 1430위안(약 26만원)이나 된다. 어지간한 대졸 신입사원 월급의 절반에 맞먹는 값이다. 원장석 EXR 상하이법인장은 “이웃 리바이스 매장의 최고급 청바지(980위안)보다 50%쯤 더 비싸지만 판매량은 오히려 그들을 능가한다”고 말했다. 톡톡 튀는 한국의 패션디자인이 중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랜드·온앤온·W닷 등 한국 패션이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륙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라네즈·이자녹스 등 화장품, 초코파이·신라면 등 식품 브랜드도 선전하고 있다. CJ홈쇼핑의 합작 TV홈쇼핑업체인 ‘동방CJ’는 기라성 같은 현지 백화점들을 제치고 상하이 3위의 유통업체로 올라섰다.

한국의 간판 산업인 반도체·조선 업체들도 대부분 진출했다. 삼성전자·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이 각각 쑤저우(蘇州)와 우시(無錫)에 둥지를 틀고 있다. 포스코는 장자강(張家港)에서 스테인리스 공장을 돌린다. 이 밖에 삼성중공업은 닝보(寧波)에서 선박을, 기아자동차는 옌청(鹽城)에서 승용차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대중 투자액 가운데 35%가 상하이와 주변 도시에 집중돼 있다.

현재 상하이에 주재하는 한국인은 약 6만 명. 주변 창장(長江) 삼각주 지역을 모두 합치면 1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상하이총영사관의 설명이다. 기회의 땅, 상하이는 지금도 한국인들을 부른다.

한우덕 기자 wood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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