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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현철 칼럼

“한국이 디즈니랜드처럼 들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 공장에서 기계류를 만들어 수출하는 한 유럽계 기업은 올 들어 실적이 크게 좋아졌다. 3분기 매출이 2분기의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날 전망이다. 2분기 실적도 1분기에 비하면 두 배 반으로 늘어난 수치였다. 하지만 이 회사 서울 사무소엔 요즘 적막감이 감돈다. 올 들어 사무실의 책상 중 절반 이상이 주인을 떠나보냈다. 연초 한 달 가까이 공장문을 닫을 만큼 일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대규모 인력 감축을 했다. 1층 로비에서 손님을 맞던 여직원까지 내보낼 정도였지만 또다시 사람을 줄여야 할 형편이다. 남아 있는 직원들은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회사가 좋아진다는데 직원들의 마음고생이 심해지는 이유는 뭘까.

‘전 분기 대비’라는 착시 효과 때문이다. 미국ㆍ유럽 수출이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이 회사는 지난해 하반기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올 1월 매출이 1년 전의 10%로 쪼그라들었다. 올 들어 수요가 조금씩 살아나고 중국 공장의 물량을 가져오면서 공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생산량은 1년 전의 절반에 불과하다. ‘전 분기 대비’와 ‘전년 동기(1년 전) 대비’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언젠가부터 정부의 경제지표나 기업 실적 발표에서 ‘전 분기 대비’가 강조되고 받아들여지는 게 일반화됐다. 지난주 발표된 2분기 국민순소득(GNI)은 1분기에 비해 5.6% 늘어나 21년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2분기 국내총생산(GDP) 역시 전 분기 대비 2.6% 늘어나 5년 반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났다.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들의 매출과 영업이익ㆍ순이익을 평가할 때도 전 분기와 비교해 얼마나 좋아졌느냐가 기준이 되곤 한다. 발표하는 측이나 받아들이는 측이나 두 가지 수치 중 더 나은 ‘전 분기 대비’에 주목한다.

이런 방식은 나름의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 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북돋는다. 갈 길이 바쁜 만큼, 다른 나라보다 빨리 수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한국엔 더 그렇다. 물이 절반 차 있는 병을 보고 걱정하기보다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걱정 말고 우물을 빨리 찾자’고 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밝은 면을 보여줘야 국민들이 희망을 얻고, 정부는 지지를 얻는다. 기업들의 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나쳐서 좋을 게 세상엔 없다. 낙관론이 지나치면 자만이 된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위기를 못 느끼는 불감증에도 걸리기 쉽다. 한 달여 전 한국에 온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한국이 너무 들떠 있다. 마치 디즈니랜드에 온 것 같다”고 했다. 국책연구기관인 KDI에서 출구전략의 필요성을 제기할 만큼 자산시장의 버블도 조짐이 심상치 않다. 서울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는 호황기 최고가를 넘어섰다. 일반 아파트와 전셋값으로 부동산 상승세가 확산되고 있다. 모두가 좋아졌다고 느낀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택시기사들은 여전히 손님이 없어 허덕이고 음식점들은 갈수록 매출이 떨어진다고 울상이다. 직장인들은 한 해 내내 좌불안석이다. “도대체 뭐가 좋아졌다는 거냐”는 불만 가득한 하소연이 중산층과 서민 사이에 가득하다.

대외 변수도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 더블딥을 예측하는 ‘닥터 둠’들은 여전히 소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 세계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미국과 유럽 모두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은 특히 심하다. 자국 은행이 망가질까봐 스트레스 테스트도 아직 하지 않았다. 부실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아직 상각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줄줄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동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경제성장률 하락과 반비례해 실업률이 치솟고 있는 중이다.

방심하고 허리띠를 풀기엔 이른 상황이다. 낙관론이 필요하지만 과도하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많이 푼 돈이 엉뚱한 곳으로 몰려가는 버블이 커질 수 있다. “좋아진다는 데 내 몫은 왜 줄어드느냐”는 이익집단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불필요한 사회 갈등이 생겨난다. 말이나 글에는 흐름이 있고, 노래에도 장단과 높낮이가 중요하다. 국민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너무 한 방향으로 흐르면 위기 극복에 도움이 안 된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떠올려보자. 베트남전 당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들은 대책 없이 조기 석방을 낙관하던 낙관론자였다. 위기를 이겨낸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냉정한 낙관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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