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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이후 대권의 꿈’ 대통령과의 관계가 주요 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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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국무총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지금껏 39명이 거쳐갔다.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가 ‘후보자’ 꼬리표를 떼면 40번째다.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대선주자형 총리, 총리 출신 대선주자’=흔히들 ‘총리감’이란 표현을 쓴다. 남다른 비중이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뉘앙스다. 발탁 당시 대선주자급일 수도 있고, 총리 경력을 디딤돌로 대선주자로 부각되기도 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이회창·이홍구·이수성,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고건·이해찬·한명숙 총리가 그 예다. 정운찬 후보자도 역시 같은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대통령과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총리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 “그와 천생연분이고 나는 참 행복한 대통령이다.” 이해찬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늘 이런 얘기를 듣곤 했다. 5선의 관록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해묵은 갈등 과제를 해결해 냈기 때문이다. 때론 “청와대에서 일을 너무 많이 넘긴다”고 토로할 정도로 일이 몰렸다. ‘실세 총리’ ‘책임 총리’ ‘분권형 총리’란 닉네임도 그래서 붙었다. 2007년 대선 국면에서 친노무현 그룹은 그를 대선주자로 밀었다.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한명숙 전 총리와 함께였다. ‘반노적 또는 비노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결국 본선엔 진출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고건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첫 총리였지만 전혀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범여권의 1등 주자였으나 노 대통령로부터 “고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란 공격을 받았다. 고 전 총리는 채 한 달여가 못 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회창 전 총리는 재임 시절부터 김영삼(YS) 대통령과 맞서 싸우면서 명성을 얻어간 경우였다. 그는 대통령의 업무인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간여하다가 YS의 진노를 샀다. YS는 “지금 당장 사표 내지 않으면 해임 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127일 만에 물러났지만 YS가 해임한 거냐, 이 전 총리가 사퇴한 거냐를 두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두 사람은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충돌했다. YS가 “독불장군 미래 없다”고 쏘아붙였으나 이 전 총리는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맞섰다. 힘이 붙은 이 전 총리는 급기야 YS의 탈당을 요구했고 신한국당을 자신의 당으로 변모시켰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노재봉 총리도 한때 ‘후계자’설이 돌았었다.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수법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권에 ‘만만치 않은 상대’란 인상을 줬다. 노 총리의 ‘차기 주자’ 부상을 눈여겨보던 여당의 YS와 야당의 DJ는 이후 강경대군 치사사건이 터지자 그에게 협공을 가해 중도하차시켜 버렸다. 정치권 인사들은 “총리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또 어떤 길을 걷느냐는 대통령과의 관계, 또는 자신의 권력 의지에 달린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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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한다”=정일권과 김종필(JP). 재임 기간이 가장 긴 두 총리다. 정 전 총리는 60년대에 6년7개월, JP는 70년대와 90년대 말 두 차례에 걸쳐 6년4개월을 역임했다. 그런 두 사람의 이임 소감은 동일했다. “대통령 책임제하에서 총리란 자리는 매우 어렵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다.”

실제 두 사람의 행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대통령과의 관계가 미묘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정일권 전 총리는 건국 이래 최고의 출세 가도를 달렸다. 역대 두 번째 장수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그의 총리 시절 경험이 이랬다. 후배 장군으로부터 “중장 진급할 것 같다.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 아끼는 후배여서 박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2주 뒤 후배 장군에게 날아든 건 예편통지서였다. 박 대통령이 정 전 총리를 견제한 거였다.

이후 정 전 총리는 늘 살얼음판을 걷듯 했다. 주변에서 혹여 “JP와 당신이 차기”란 얘기를 할라치면 곧바로 “난 행정가지 정치가가 아니다”라고 펄쩍 뛰곤 했다. 그의 국회의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신경식 전 의원은 “그렇게 조심해서 장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JP는 박 대통령의 혁명동지이자 처삼촌-조카사위의 ‘특수한 관계’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 주변에선 늘 그를 견제했다. 그가 총리가 된 건 71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위해 적극 뛴 이후였다. 그 무렵 박 대통령은 그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다음은 임자 차례야. 이번 한 번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되겠어? 나 좀 도와줘.” 박 대통령은 그러나 72년 JP도 모르게 유신 개헌을 결행했다. JP는 이후 “왜 조선조에 뒤주대왕(사도세자)이 생겼는지 권력자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JP는 이 같은 ‘2인자로서의 숙명’을 잊지 않았다. 그는 98년 김대중(DJ) 대통령과 공동 정권을 만들어냈고 다시 총리가 된 뒤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는 등 지분은 확실히 챙겼다. 말 그대로 실세 총리였다. 그러나 DJ에 대한 배려 또한 확실히 했다.

◆명멸한 총리들=전두환 정부 시절 김상협 총리는 최초의 호남 출신이었다. “막힌 것을 뚫고 굽은 것을 펴겠다”고 취임 포부를 밝혔으나 곧 주변에 그 한계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한기 총리 지명자는 선비풍의 학자였다. 그로선 박종철군 사망 사건 이후 격랑을 헤쳐나가기가 역부족이었다. “재임 48일이 48년 같다”고 그는 고통스럽게 회고하곤 했다.

YS 정부 시절의 이홍구 총리는 적극적으로 ‘그림자 총리론’을 펴며 행보를 조정했다. 각료를 가장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게 총리고,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걸 보완하는 게 총리라는 생각을 했다. 정치적 문제에도 가급적 개입하지 않았다. 총리실 직원들에겐 “영국 신사인 총리”(정두언 의원의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로 기억됐다. 

고정애·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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