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6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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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제7장 노래와 덫

목돈을 쥐고 있는 도매상이나 중간상인들은 수산물의 출고를 차단하거나 사재기로 제 몫을 챙길 수 있겠지만, 종잣돈이 달랑거리는 장거리 노점행상들은 도매상들이 딴죽을 걸고 들면 이미 몸에 붙은 옴처럼 곱다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창궐하는 것은 욕지거리와 소줏집의 북새통이었다. 벌써 대처의 낯선 도매상들이 선착장과 도매상을 기웃거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동안 한산했던 영동식당도 대낮부터 술꾼들로 북적대는 날이 많아졌다. 술병 깨지는 소리와 푸념과 넋두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신바람이 난 사람은 묵호댁이었다.

그녀는 조리대와 식탁 사이를 부리나케 오가면서 욕설과 육담으로 술꾼들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바빴다. 그러나 욕지거리를 퍼부어 댈 과녁조차 마땅찮았던 어부들과 노점행상들은 걸핏하면 자기들끼리 멱살잡이를 하고 싸움질이었다.

요사이 신문들은 펼쳐 들면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사진이었다. 활자보다 사진이 더 많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정도로 많은 지면을 사진에 할애하고 있으면서도 한일어업협정에 실무자로 참석했었던 사람들의 사진은 어느 지면을 꼼꼼하게 살펴봐도 찾아 낼 수 없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 수 없다고 성토하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죄없는 어부들끼리 멱살잡이가 벌어지고 피칠갑이 되는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식탁이 박살나고 집기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기 때문에 새벽녘에 가게문을 닫고 혼자 앉아 그날 매상한 셈속을 따지다 보면, 밑가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하였다.

부서진 식탁들을 꿰맞추어 다시 못질하고 깨어진 집기들을 구색 맞춰 벌충하다 보면,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싶도록 허탈해지는 것이었다.

언제 수금될지 알 수 없는 외상도 자꾸만 늘어났다. 출어도 않는 어부들이 목이 미어지도록 마시고 나서는 생색까지 하면서 긋는 시늉을 하고 문을 드르륵 열고 나가 버렸다.

드디어 묵호댁까지 악다구니가 시작되었다. 인심이 나날이 흉흉해지는 포구에서 살아남을 길이란 악다구니뿐이란 것을 묵호댁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묵호댁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술꾼들도 생겨났다.

출어가 뜸해진 어부들 중에서 몇 사람이 낮에 스스럼없이 가게로 찾아와서 묵호댁을 품앗이하는 축들이 생겨난 때문이었다. 식탁에 못질도 대신해 주고 찌그러진 창문도 고쳐 주었다. 멀리까지 다녀와야 하는 수고를 마다않고 외상값도 대신 받아 주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보았으나 품앗이가 거듭되면서부터 묵호댁도 솔깃해졌다. 떠나가 버린 박봉환을 기다린다는 것이 속절없는 짓이란 반성이 새록새록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기약없는 사내를 기다리며 밤을 홀로 지새곤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그 중에서 두 사람 정도는 묵호댁이 눈짓만 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박봉환이가 그녀에게 남기고 간 자욱은 한가지뿐이었다. 그녀로 하여금 사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박봉환이와 승희가 만난 것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고 항상 곁에 있어 주는 사내가 없으면 고작 네 개 식탁뿐인 가게조차 끽소리 없이 꾸려 나가기가 손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와중에 진하게 접근해 오고 있는 사내들 가운데 선택의 고민까지 겹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결정에 도달하려 들면 반드시 가로막고 나서는 사람이 또 박봉환이었다. 떨쳐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굳히려 들면 벽에 그려 놓고 바라보는 화상처럼 그의 얼굴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호댁은 일은 저질러 놓고 보자는 쪽으로 심사가 기울고 말았다. 사내란 그만치 절실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선택한 사내는 주문진이 객지라는 상고머리이고 동갑내기인 심씨였다.

그 역시 충청도 산골에서 흘러든 어부였지만 지금은 일자리를 잃고 부질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처지였다. 공판장 근처에 사글세방을 얻어 혼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추파를 던지면 당장 끌려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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