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상. 멕시코에 배운다/ 금융부실이 재정부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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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보다 3년 앞서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평가되던 멕시코는 지금 심각한 후유증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구조조정의 2년째로 접어든 한국에 멕시코의 경험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2월 멕시코의 클레히오 데 멕시코대학원에서 특강과 함께 한국과 멕시코의 구조조정을 비교하는 세미나를 가진 바 있는 안충영 교수가 이와 관련한 기고를 보내왔다. 이를 두차례에 걸쳐 싣는다.

멕시코는 82년 외채위기 이후 또다시 94년말 국가부도에 직면해 95년에는 마이너스 6.9%의 경제성장과 7.5%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과 후속 구조조정에 힘입어 96년에는 플러스 5.1%, 97년에는 7.0%의 성장을 이룩했고 실업률이 2년여만에 3.2%로 낮아지는 등 IMF체제를 신속히 벗어나고 경기회복을 조기에 이룩했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의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공적자금 투입으로 처리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정리의 후유증이 멕시코 경제회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세디요 정부가 금융부실에 대한 책임규명과 은행의 철저한 자구노력 없이 막대한 은행 부실채권을 재정자금으로 처리한데 있다. 은행의 자기자본 건전성은 일단 확보했지만 처리과정에서 원칙 부재와 투명성의 결여로 심각한 도덕적 해이 문제를 제기하고 엄청난 재정부실의 뇌관을 심어놓게 됐다.

멕시코 정부는 예금보험기구 (FOBAPROA) 를 통해 부실은행을 인수하거나 은행의 후순위채를 매입하는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6백50억달러 (70조원 규모) 의 은행 부실채권을 정부공채로 정리했다. 그 결과 지금 정부가 부담해야 할 공채의 이자만도 현재 월 10억달러에 이른다.

살리나스 정부는 국영은행을 민영화할 때 집권세력의 측근이나 증권 브로커 출신들에게 이양했으며, 금융감독체계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다. 금융기관의 경영진과 권력층 사이에 존재하는 먹이사슬이 부실채권을 양산했다. 은행경영진들은 심지어 자신 소유의 회사에까지 대규모 대출을 했고 그에 따른 배임행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부의 부실채권 매입과정은 베일속에서 진행됐다. 처음부터 상환할 의도가 없던 은행 대출금이 횡령됐지만 예금보험기구는 '불명확 대출 계정' 으로 우선 처리했다.

은행들은 대출금을 회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고 예금보험기구는 채무자들의 저당자산들을 회수하는데 소홀했다. 거액의 은행돈을 횡령한 전직 은행장들은 해외로 도피했다.

금융전문가들보다 은행과 가까운 정부 관료들이 부실정리를 담당했기 때문에 정리과정에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게 됐다.

파산절차법의 미비도 부실채권 정리 자체를 부실케 한 요인이 됐다. 현행법으로는 부도기업의 자산처분 지연은 물론 금융기관 경영진과 주주의 부실경영 책임을 따질 수가 없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여야간의 기선잡기 경쟁에서 예금보험기구를 통한 부실채권 정리과정은 주요 정치쟁점화했다. 두 개의 거대 야당 중 급진적 민주혁명당 (PRD) 은 부유한 은행 경영진의 배임으로 일어난 부실채권을 국민이 몇세대를 두고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여 공세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수적 야당인 국민행동당은 불량채권의 공채 전환은 용인하되 은행도 일부 책임을 지며, 오티즈 중앙은행 총재 등 은행경영진이 퇴진할 것을 주장한다.

멕시코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미 40조원이 투입된 금융부실채권의 처리과정에서 투명성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부실에 따른 책임소재의 명확한 규명과 그에 따른 민.형사적 책임을 묻고 금융기관의 자구노력이 선행되고 난 다음 불가피한 결손분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특혜의 시비가 사후에 발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몇 세대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금융부실을 뒤처리하는 멕시코형 불량채권 정리가 되지 않아야 한다.

안충영 <중앙대 교수. 국제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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