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학' 인문학계 전반 새 방법론으로 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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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사상체계나 이론을 중심으로 연구해왔던 학계에 학자나 사상가의 삶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체계를 이해하려는 '전기학 (Biography)' 이 광범하게 이용되고 있다.

사상.이론을 중심으로 해왔던 기존의 연구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이론의 피와 살이 되는 생생한 현장감. 특정의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왔으며 어떤 삶으로 대처했는가는 이론의 배경 뿐 아니라 그 이론의 현재적 의미를 살피는데도 중요하다.

김학준 인천대 총장 (정치학) 이 87년 '이동화평전' (민음사) 등의 전기물을 출간하면서 정치적 인물을 학문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정치전기학'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은 있다.

이를 방법론으로서 체계화를 본격 시도한 것은 신복룡교수 (건국대.정치학) .그는 정치철학자 아이작 도이쳐의 '정치전기학' 이라는 용어를 빌려 지난해 가을 한국정치학회 추계발표회에서 정치학의 한 분과로 설정할 것을 제안하고 최근 그것을 구체화하고 유럽과 중국의 연구성과를 건국대 사회과학논총 22호에 '전기정치학 시론'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신교수는 자칫 영웅사관에 빠지기 쉬운 자전 (自傳) 이나 문중사학 (門中史學) 이 아니면서 동시에 민중사학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기학' 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학에 앞서 이미 역사.문학.철학 등 인문학에서는 '전기학' 을 주요한 방법론으로 원용해왔다.

이같은 경향은 최근의 석.박사 학위논문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번에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학위를 받은 최연식씨의 논문 '균여연구' 를 비롯해 수많은 학위논문들과 사회주의 민족운동가로 학계에서 소홀했던 이동휘의 전기를 다룬 '성재 이동휘 일대기' 등도 이같은 경향의 반영이다.

인물탐구를 총서 형식으로 펴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 갈릴레이.막심 고리키.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소개한 한길사의 '로로로 시리즈' 와 레비스트로스.마르크스.소쉬르 등을 소개한 시공사의 '로고스 총서' , 엘리엇.릴케.토마스 만.플로베르 등 서양문학사의 주요 인물들의 발자취를 추적한 '위대한 작가들' (책세상) 등이 속속 출간되며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다.

이밖에 '히틀러 평전' (푸른숲) '앙드레 말로' (한길사) '인간 발자크 (리브로)' 등의 단행본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종묵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국어학) 는 이런 경향에 대해 "한 사상가의 저서나 사상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 이라 설명한다.

신복룡교수는 "정치학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전기학의 한 분야로 새롭게 자리잡을 것" 이라 예견하고 "이를 위해 전기학이 갖는 독자적인 연구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고 주장한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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