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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33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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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8장 노래와 덫

마침 장터 근처에는 뜨내기 노점상을 겨냥해서 은밀하게 문을 연 민박집이 있었다. 방 사타구니마다 아궁이 한 개씩인 방들만 다닥다닥 연달아 붙어 있는 산판의 함바와 같은 초라한 숙소였다.

옛날에는 여인숙 허가로 영업을 했던 곳인데, 어쩜 셈인지 허가증을 반납하고 민박집으로 바꾼 것이었다. 세금 있는 여관업보다 세금 없는 민박집 수입이 남 보기에도 야단스럽지 않으면서 수입은 오히려 짭짤했기 때문이었다.

신세대들처럼 머리카락에 빨간 염색을 한 배불뚝이 과부가 혼자 경영하고 있어 승희는 안방에 끼여 자기로 낙착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수돗가에는 뒤늦게 숙소로 찾아든 노점행상들이 네댓이나 몰려 억죽박죽 소란을 피고 있었다.

부엌에서 데워 온 뜨거운 물과 수도에서 받은 차가운 물을 서로 섞느라고 김이 피어올라 사람의 형용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집에서 며칠 묵은 이력이 있는 태호는 솥에서 설설 끓고 있는 더운 물을 무한정으로 퍼내 써도 본척만척하였지만, 다른 축들이 부엌 근처에 얼씬거리면 예외없이 물을 헤프게 쓴다고 면박부터 주었다.

태호가 과부의 눈에 심성이 예쁘장스런 사내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수완도 아닌 말 한 마디로 비롯된 것이었다. 오십나이가 넘은 과부를 초면에 만나 대뜸 누님으로 호칭했기 때문이었다.

파장무렵에는 필경 대문을 지켜보고 있다가, 태호가 마당으로 들어서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상 (동생) 춥재? 뜨거운 물 끓여 놨으이 맘대로 갖다 쓰게에이. 더운 물 한 가지는 소원 없이 뒤집어쓸 수 있었던 태호는 그래서 땟국물이 쑥 빠진 면상을 가지고 있었다.

말만 잘하면 절간에서도 젓갈 맛을 본다는 옛말이 흰소리가 아니라고 낄낄대고 있는 태호를 철규는 방으로 불러들였다.

"시방 더운 물깨나 양껏 뒤집어쓰게 됐다고 헤헤거리고 있을 때가 아냐. " "선배 또 웬 면박이시우?" "오늘 장사해 보니까. 간고등어장사 한 시절 지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맞습니다. 한물 갔어요. 요즘 장터에 나가면 너도 나도 간고등어장수들뿐이에요. " "겨울 별미라면, 우선 굴을 들 수 있겠지. 흔히들 바다의 우유라고 말하잖아. 굴이라면 서해야. 거제.통영 앞바다.산양해역.가막만 같은 데서 채취한 자연산이 소문나 있고, 서해안 갯벌에서 나는 바지락도 겨울철 별미야. 화성의 제부나 백리리나 화산과 원안 갯벌도 가막 특산지라는구만. 보성에서 나는 고막도 괄시 못할 특산품이지. 동해 쪽으로는 강구나 후포 그리고 죽변에서 잡히는 영덕대게야. 요사이는 울진대게라고 부르기도 하더군. 어디 울진뿐인가.

어찌된 셈인지 강릉이나 주문진에서도 대게가 잡히더군. 대개는 끽해야 오월까지 잡히는 것인데 동해에 난류대가 형성되면서 앞으로 한물이 계속될 조짐이야. 그 다음이 곰치야. 삼척에서 울진으로 가다 보면 정라포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주산지라는구만. 포항의 과메기도 지금이 한철이지. 고민거리는 명태 때문이야. 지금 한물이어야 할 때인데 어장 형성이 안 되나봐. 덕장 김사장까지 찾아가서 얘길 들어 봤는데, 내가 미안할 정도로 김사장 먼저 울상이더군. 근해 어장에서 볼장 다 봤다면, 원양태만 노릴 수밖에 없겠는데, 삼월 이후에 떼어다가 장거리에 팔자면, 숱한 곤욕 치러야 할 걸. "

"그래도 구색을 맞추자면, 명태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죠. 한씨네 하면 명태장수로 이름이 난 것인데 포기해 버리면 한씨네는 어디가서 찾아냅니까?" "구두계약은 해 둔 셈이지만, 물건도 달리고 품질도 지난해 같지 않을 테니 낭패야. "

"대게장사로 바꿔 보자는 의향을 가진 것 같은데, 그건 모험입니다. 팔기도 전에 손실부터 신경 써야 할 상품 아닙니까. 삼사일 안에 처분도 못하고 이 장 저 장 끌고 다니다 보면, 남는 것은 말라붙은 껍질뿐일텐데요? 다리 보고 들여가는 어물인데, 다리 떨어져 나가면 거들떠보기나 하겠어요? 봉환이 형은 뭘로 견디고 있대요? 소문 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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