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입김 센 범죄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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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근 20년 전.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한 평검사가 반공법사건 피의자를 무혐의불기소로 풀어준 일이 있다.

그는 몇주 후 옷을 벗었다.

풀려난 피의자는 스스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대학생이었다.

담당검사였던 구상진 변호사는 담담하게 술회한다.

"초등학교때부터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황당한 자백만으로 어떻게 유죄를 주장할 수 있는가. " 본인에게 불리한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빨갱이가 아니라고 본인이 주장해도 뒤집어씌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에 자칭 빨갱이를 '증거불충분' 으로 풀어주다니, 당시의 인사권자에게는 상식 밖의 처분이었던 모양이다.

법의 원리를 지키려다가 이런 상식 아닌 상식에 밀려 검찰을 떠난 검사는 한둘이 아니다.

아무 증거 없이 이종기씨의 진술만으로 검사장들이 줄줄이 옷벗는 모습을 보며 수십년간 검찰이 키워온 '상식' 의 분위기를 절감한다.

국가사회를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형법의 원칙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 검찰의 분위기였다면 李씨의 말 한 마디에 증거고 나발이고 없이 '부패검사' 가 되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경찰의 최고 인사권자는 탈주범 신창원이라는 말이 있다.

5공비리로 궁지에 몰린 장세동씨는 "내가 입을 열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고 으름장을 놓았다.

슬그머니 YS비자금을 흘린 정태수씨는 희희낙락하는 여당 의원들을 보며 빙긋이 웃음짓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종기씨가 검찰을 쥐고 흔든다.

공권력이 혼내줄 사람들이 거꾸로 공권력을 혼내주는 이 희한한 현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털어서 먼지 안 날 놈 없는' 사회이기 때문일까. 범죄자들에게 농락당하는 공권력의 공신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종기씨가 연루자를 불면서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최대한 보호했다는 말이 돈다.

수사당국과의 '빅딜' 로 적정선의 자백을 한다는 말도 돈다.

그러다보니 수사당국이 원하는 인물과 李씨가 싫어하는 인물들을 표적으로 삼는다는 의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의혹이 일어나는 것은 상식다운 상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李씨가 증거도 없는 자신의 비리사실을 술술 토해내는 까닭을 모르니 '빅딜' 설이 나오고 그 진술만으로 검사들이 줄줄이 날아가니 '표적' 설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검찰의 총체적 난맥상이 드러났는데도 검찰총수의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정부가 우기니 국민의 정부 역시 '검찰 끼지 않은 정치' 에 뜻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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