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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한국 떡값, 미국 떡값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궂은 일은 겹쳐 닥친다던가.

박상천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이달 24일부터 사흘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해 주제발표를 하게 돼 있다.

앨 고어 미 부통령이 세계 60여개국 대표들을 모아 '부패와 싸우며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사법기관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를 놓고 여는 회의에서다.

朴장관이 맡은 주제는 (부정.부패를 막는) '법적 토대와 사법기관의 역할' 이다.

이어질 토론에서는 검찰 등 수사기관들의 독립성과 수사 기법.과정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백악관 자료는 밝히고 있다.

고어 부통령으로선 딱 떨어지는 발표자를 맞는 셈이지만 朴장관이 어떤 알맹이를 어디까지 다룰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떡값 받은 검찰간부를 잘랐다는 이야기야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얘기 못할 것도 없겠으나, 검찰 독립을 놓고는 껄끄러울 데가 많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얼버무리기도 어려운 것이 워싱턴은 현직 대통령을 특별검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진 살벌하고도 황당한 곳이 아닌가.

이런 궂은 일을 또 맡게 된 朴장관은 사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대타 (代打) 다.

고어 부통령은 처음에 金대통령을 초청하려 했으나 같은 때에 서울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제회의를 여는 金대통령도 고어 부통령을 초청하려 해 서로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 독립은 애꿎게 朴장관이 나설 일이 아니다.

'권력의 시녀' 란 비판이 고검장급에서 나왔기에 망정이지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의 입에서 나왔더라면 정말 큰일 날뻔하지 않았는가.

얘기를 꺼내도 큰일 나지 않을 사람은 대통령 한사람뿐인데 하필이면 金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의 일정이 겹쳐 마음 놓고 하는 주제발표를 못 듣게 된 것이 아쉽다.

국내의 떡값.항명.서명파동과 워싱턴의 국제회의 사이에는 이런 얄궂은 우연 말고도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지구촌 부패척결 운동은 글로벌리제이션의 주요 줄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의 국제교역 뇌물방지협약은 오는 15일부터 발효된다.

고어 부통령의 국제회의는 2000년 대선을 겨냥해 깨끗한 대통령감이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부패척결이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맞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패는 도덕의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안정과 성장을 해쳐 세계 교역의 걸림돌이자 세계적 경제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데 학자.국제기구들은 더욱 더 주목하고 있다.

OECD 협약도 그래서 나왔다.

부패척결이 선진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이익이라는 합의다.

구체적 방법들도 이미 다 나와 있다.

'법에 의한 지배' 라는 토대, 촘촘한 제도적 그물, 독립된 사법기관의 파수꾼 노릇 등이다.

바로 朴장관의 발표주제다.

이런 마당에 떡값처럼 '아무도 자유롭지 못한 관행' 을 그때 그때 권력의 자의 (恣意) 로 자르는 대신 이제는 '누구나 예외가 없을 토대' 를 놓자고 하는 것은 그저 "너부터 옷 벗어라" 가 아니라 글로벌리제이션 속에서의 국가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OECD 협약이나 워싱턴 회의의 주제를 바꿔 말하면 "더욱 얽히고 설킬 글로벌리제이션 속에서 부패 처리기준이 모호하고 동떨어진 나라는 살아남기 어렵다" 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떡값이라는 작은 관행 하나 다루는데도 법에 의한 지배와 제도적 기준이 없다면 정치자금이라는 정말 큰 관행을 제대로 다룰 수 없고, 근본적으로 권력의 집중에서 비롯되는 우리 사회의 질긴 먹이사슬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세풍 (稅風) 사건 때 구속된 임채주 (林采柱) 전 국세청장이 만일 "과거 정권에서의 일부터 수사하라" 고 했다면 벌집을 쑤시는 것은 고사하고 국가 신용에 더 큰 상처가 패었을 것이다.

검찰권 독립과 마찬가지로 조세권 독립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세풍에 놀란 외국자본이 합작을 포기하거나 주주 소송을 걸거나 주식을 팔아치우는 일이 앞으로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대통령에 대한 수사도 결정할 수 있는 미국의 법무장관은 떡값 같은 일로 고심할 필요가 없다.

법령에 대통령이든 말단 공무원이든 이해가 걸린 사람으로부터 건당 20달러, 1년간 50달러를 넘는 선물을 받으면 안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이후 원화 가치가 떨어져서 그래도 좀 커보이지 위기 전 환율로 따지면 미국 공무원들은 대략 건당 1만8천원이나 연간 4만5천원에 묶여 있는 셈이다.

미국은 이처럼 '껌값' 도 법령에 정해놓고 누구에게나 적용하고 있다.

김수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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