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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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34면

우리 민족은 왜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까? 여름휴가 여행 도중 인천 대부도에서 배를 타고 주위 섬들을 둘러보면서 든 의문이다. ‘동북아의 관문’을 지향하는 인천과 서해안은 그 거창한 목표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낙후된 채 과거와 현재 사이 그 어딘가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요즘 식자들 사이에선 『대항해 시대』(주경철 지음)같이 우리의 시각으로 근대 문명의 발전을 재해석한 역사서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다 보면 5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가 왜 적극적으로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과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이순신과 장보고. 우리 역사에서 바다와 결부돼 떠올릴 수 있는 두 명의 위인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다로 나아간 것은 바다를 개척하기 위해서도, 바다 너머의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장보고는 노예로 잡혀간 신라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장보고 이후 우리 역사에서 바다 개척과 관련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바다는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러나 바다는 소통의 통로였다. 부와 성공의 기회를 찾아 목숨을 걸고 떠난 바닷길에서 서양의 근대가 시작됐다.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측 기술은 선주와 선원들에겐 죽고 사는 문제였다. 나침반과 화약이 중국에서 발명됐지만 이를 실용화한 것은 서양 해상세력이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하였을까. 같은 시기에 한국과 중국은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해 바다를 향한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다.

일부 전문가는 동서양의 의식 구조 차이를 문자 체계의 차이로 설명하는 해석이 있는데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문자로써 우리는 세계를 재현하고 그것이 우리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문자와 표기 대상 간의 아날로그적 연관성이 없는 알파벳 문명권의 서양적 사고는 나와 세계를 분리해 객관화하고 추상화하게 만든다. 그래서 항상 정확한 재현을 위해 더 정교한 기술과 논리를 추구한다.

그 결과 서양은 과학과 탐구, 탐험, 정복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부작용도 있다. 인위적인 체계에다 세상을 맞추다 보니 가학적이며 억압적인 심리기제가 나타난다. 무력을 앞세운 서구식 근대화가 폭력의 세계화란 폐해를 낳은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반면 한자 문명권에서는 상형문자가 정신세계의 구심점이다. 그림에서 출발한 상형문자는 표기 대상과의 단절이 없고 이는 나와 세계 간의 연결적인 사고를 형성한다. 동양의 세계는 파악하고 탐구할 대상이 아니라 현실세계와의 조응을 통해 안정적이며 조화로운 세계관을 드러낸다. ‘왜’라는 질문에 소극적이다 보니 과학의 발전이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지금 우리는 세계를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잘 모르고 한글과 영어로 소통한다. 그들의 정신에 상형문자적 각인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여전한 내부지향적 성향은 경제발전과 문화적 성숙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수출 의존도 50%, 세계 11위 무역강국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구촌 현안에 등을 돌린 채 국내 문제에만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치·사회 뉴스의 과잉, 그리고 극히 국내적이고 지엽적인 사안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파괴적인 연쇄반응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에서 중국은 평화적 소통을 상징하는 ‘정화의 원정’을 극화해 보여줬다. 참 인상적이었다.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아시아 국가가 아님을, 그리고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아가는 국가적 비전을 보여준 것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리고 머리 위로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북한이라는 나라를 이고 있어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는 우리야말로 더 적극적으로 바닷길을 개척하고 세계와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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